송종규 시인
그림 위에 또 하나의 그림을 덧그려서 밑그림을 감추는 미술의 기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의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을 덧그려서 처음의 것이 보이지 않게 감추는 것이다. 이렇게 작자의 의도를 숨기는 것은 현대시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하나의 그림을 다른 그림으로 덧칠해서 감추는, 밑그림을 캔버스에서 아예 보이지 않게 덧칠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 그림에 담긴 메시지가 위험하고 민감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있거나 현실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의 흔적을 그렇게나마 은밀하게 남기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최후의 행위였을 것이다. 이렇게 감춰진 밑그림은 수 세기가 지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어둠 속에 갇힌 채 그대로 소멸 되기도 한다. X광선이나 정밀한 현대적 기술을 동원하거나 도구를 이용해 위의 덧그림을 긁어내고서야 숨겨진 그림은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한다. 완전히 묻혀버릴 수도 있는 자신의 작품을, 그 내밀한 사정을, 그렇게라도 꼭꼭 숨겨놓지 않으면 안 될 화가의 어떤 극진함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극진함이 아니라 결단 같은 것 아니었을까.
사실, 작품 위에 두꺼운 물감을 덧칠하는 순간, 그림은 우주 저 멀리 아득한 시간의 늪 속으로 새처럼 날아간 것. 그렇지만 이렇게 은밀한 방식으로라도 발설하지 않고는 못 견딜 지극한 삶의 절실함이 그에게 있지 않았을까. 비단 화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문장 속에 나를 숨겨 놓았을지, 당신은 또 얼마나 많은 패착과 승리의 문법 뒤에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당신만의 문법을 감추고 있을지. 사실, 시의 문법에서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거나 시의 내용을 철저히 분석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세상은 복잡하고 난해해졌고 시인이나 독자의 의식 또한 중의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첩되고 암호화하는 시대에 도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본질은 진실과 절실함에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밑그림에 숨기듯이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의 뒤편에 필살의 무기를 끼워 넣는다. 그리고는 기다린다.
삶은 사실, 추억으로 남기는 두꺼운 액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원하리라 믿었던 순간도, 실망과 분노의 순간도 고요히 액자 속에 머문다. 때로는 흘러가면서 추억은 확대되거나 잊혀지거나 축소되어 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득 어느 낯선 연안에 닿아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것 아닐까. 혹시 우주 멀리 날아간 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는 건 추억이 많다는 것, 그리운 것이 많다는 것.
어느 일간지에서 본 17세기 네델란드 작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 창가에서 연애편지를 읽는 여인이 다시 떠오른다. 21세기가 되어서야 화가가 의도했던 숨겨진 그림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사연 많은 그림 속 여인, 그녀의 손은 혹시 떨렸을까, 그녀는 혹시 답장을 보냈을까.
수 세기가 지난 캔버스 속이 환하게 밝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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