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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그단새] 예천형평사 습격 사건

2026-06-30 06:00
안도현 시인

안도현 시인

백정은 혼인할 때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다. 여자들은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남자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다. 죽은 후에도 상여를 타지 못했다. 조선시대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은 구한말까지 호적에 '도한(屠漢)''도부(屠夫)'로 차별적으로 기재되었다고 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형식상 신분제를 폐지했지만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멸시는 오래 지속되었다.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신분 해방을 부르짖으며 형평사가 창립되었고, 조선형평사 경북지부는 그해 6월 대구에서 출범되었다.


형평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다. 우리도 평등하게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이들의 요구는 백정이라는 칭호를 폐지하자는 것, 자녀들에게 학교 교육의 기회를 달라는 것 등 비교적 온건하고 정당한 것이었다. 이 혁신적인 신분 해방운동을 폭력으로 방해하고 노골적으로 해코지한 세력은 놀랍게도 머슴을 포함한 소규모 소작 농민들이었다. 봉건 구습에 젖어 있던 이들은 자신들보다 신분이 낮은 백정들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속속 만들어지고 그 목소리가 커지는 걸 보고 배알이 꼴렸던 것이다.


1925년 8월9일 예천에서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 반형평 세력의 습격사건이 벌어졌다. 예천형평사 2주년 기념식에서 예천청년회장 김석희의 축사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는 형평사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아냥거리는 발언을 내뱉었다. 형평사원들이 크게 격분하면서 그와 언쟁을 벌였고, 일제 경찰의 제지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8시부터 수백여 명의 군중들이 떼를 지어 예천형평분사를 포위하고 습격했다. 그들은 백정을 다 때려죽이라고 소리치며 기념식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형평사원과 가족들을 구타했다. 이에 맞선 형평사원들과 난투극이 이어졌다.


그다음 날 밤 11시에도 수백여 명의 군중들이 예천형평분사 회관을 공격했다. 형평사원들은 몽둥이와 칼로 무장하고 대기를 하고 있었지만 군중들과 격전을 피할 수 없었다. 부상자들이 생기자 일제 경찰은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남은 군중은 몇 달이든지 계속적 행동을 취하여 형평사가 없어질 때까지 필사적으로 싸워 보겠다고 하여 그 형세가 매우 험악하였다."(동아일보 1925. 8. 15.)


8월11일, 예천 곳곳에서 소식을 듣고 모여든 농민들의 숫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이들은 위력을 과시하며 재차 예천형평분사를 맹렬히 습격했다. 경찰이 제지할 수 없는 무정부상태의 상황 속에서 혈투가 벌어졌다. 농민들은 서울의 형평사 본부에서 내려온 장지필, 이이소와 안동 화요회의 김남수, 예천형평분사장 박원옥 등을 집단 구타했다. 이들은 형평사원의 집을 수색해 닥치는 대로 가족들을 구타하고 형평사에 우호적인 신흥청년회 사무실도 습격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검색해 보면 예천형평사 사건을 아주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는 8월16일자 사설에서 "형평사원과 농민 간에 차별이 있으면 몇 만분의 일이 있으며 조선인이라고 하는 공동의 비참한 운명을 지닌 마당에 무엇이 어느 만큼 다른 것일까?"라면서 농민들을 질타했고, 8월21일 자 기사는 서울에서 23개 단체가 예천사건 대책 실행위원회를 꾸린 사실을 보도했다. 나는 백 년이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세월을 덧없다고 해야 하나? 예천형평사 회관이 있었다는 백 년 전의 남본동 '매립지'에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워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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