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정 쿤스트하우스 대표
손이 기억하는 것과 손이 한 번도 닿지 못한 것. 두 가지 사이에 사람의 생애가 있다.
팔순이 넘은 어르신이 색연필 상자 앞에 처음 앉던 날, 손을 뻗었다가 거두기를 몇 차례. 어르신은 "이런 건 다 손자들이나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하며 어색하게 웃으셨다. "비싸지 않으냐"고 묻는 눈빛에는 낯선 물건에 대한 두려움과 평생 자신을 지워온 세월이 배어 있었다. 한참을 신중하게 고르던 어르신은 노란색 한 자루를 겨우 집어 들고는, 한동안 쥐고만 있었다.
"내가 이 나이에 미술이라는 걸 처음 해봅니다, 선생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한글도 늦게 배웠다는 짧은 고백 위로 수십 년의 세월이 얹혀 있었다. 그날 어르신이 그린 것은 노란 동그라미였다. 선은 떨렸고 시작점과 끝점은 만나지 못했다. 한참 동안 자기 그림을 들여다보는 눈빛은 잘 그렸는지 평가하는 눈이 아니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처음 마주한 아이의 눈, 놀람과 얼떨떨함 그 어디쯤에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완성된 그림보다 그날의 눈빛을 더 오래 기억한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는 기가 막히게 잘 안다. 무릎의 통증, 가팔라진 계단,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들. 몸이 보내는 신호는 정직하고 가혹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모르는 것이 있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들의 존재다. 어르신이 평생 색연필을 쥐지 못한 것은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세계가 품어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빈 종이 앞에서 가장 오래 망설이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아이들은 선이 비뚤어도 신나하지만, 어른은 첫 선을 긋기 전에 이미 실패를 예측하고 시작조차 거둔다. 할 수 없는 것이 늘어난 게 아니라,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 늘어났을 뿐이다. '나이 탓'이라는 핑계가 쌓이면 어느 순간 그 무게가 진짜 자신의 한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어르신이 고른 노란색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이 가는 대로 뻗는 일, 그토록 단순한 본능을 우리는 언제부터 스스로에게 금지해 왔을까.
늙어간다는 것은 매일 조금씩 낯선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진짜 수용은 잃어가는 것들을 직면하면서도, 아직 허락하지 않은 것들을 향해 용기 있게 손을 뻗는 데 있다. 상실을 인정하는 것과 가능성을 닫아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두 방향을 동시에 안고 가는 것, 나이 듦을 살아내는 진짜 방식은 거기에 있다.
팔순의 노인이 처음 쥔 색연필로 그은, 시작과 끝이 만나지 못한 비뚤어진 노란 동그라미.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이 알아봐 주지 않아도, 내 손끝은 이미 새로운 세계를 알아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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