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1천근 줄테니 그를 잡아라”…일본군 떨게 한 태백산 호랑이
1907년 일본군 토벌작전에 맞서
영릉의진, 산악 중심 유격전 전환
산발적 기습공격으로 토벌군 농락
일본군 생포·회유작전 실패하자
현재 가치 수백억원 현상금 걸어
2년8개월 태백산맥 누빈 신돌석
새로운 투쟁의 길 모색하던 중
옛 부하 형제에 허무하게 살해돼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의 충의사.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의 충의사.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 충의사에 봉안된 장군의 영정. 신돌석 장군은 영릉의진을 이끌며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펼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신돌석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 기념관 입구에 있는 장군의 흉상.
1907년 7월19일 오전 12시40분쯤, 고종이 강제 퇴위되었다. 7월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내정은 완전히 일제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8월1일,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후 해산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 부대에 합류했다. 전국 의병진의 재정비였다. 이에 일제는 대대적인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의병 탄압을 강화했다. 그리고 신돌석을 가장 위협적인 의병장 중 하나로 인식하여 집중 추적하기에 이른다. 타격을 입은 신돌석의 영릉의진은 산악지대 중심의 유격전으로 전환한다.
◆토벌 대 반토벌…유격전의 전설이 되다
1907년 후반 일본군의 '토벌' 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신돌석 장군의 영릉의진은 '반토벌' 작전으로 맞섰다. 1차 전투는 1907년 9월15일이다. 영릉의진은 영양 동북방 20리 지점에서 일본군 토벌대 제1종대(縱隊)와 마주쳤다. 치열한 전투 중 영릉의진은 지형지물을 활용해 토벌군을 교란시킨 후 사라졌다. 이후 토벌 작전의 강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2차 반토벌 작전은 1907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혹한기에 펼쳐졌다. 일제의 토벌대는 3개 중대에 삼척 주둔 일본군이 합세하고 경찰까지 총동원되었다. 영릉의진은 일본군의 이러한 동태를 주시하면서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기습 작전을 펼쳤다.
그러던 1908년 1월10일 검마산과 백암산 사이 독곡 요새가 일본군에 탐지되면서 영릉의진은 큰 손실을 입었다. 의진은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20~5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여 영양과 울진을 넘나들었다. 일본군은 신돌석 의진의 주력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돌석 장군의 생가와 2㎞ 떨어진 고래산 자락에 위치한 신돌석장군 유적지. 신돌석 장군 유적지 충의사(가운데)와 동재, 서재 전경.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 기념관. 장군의 삶의 내력과 일제의 만행에 항쟁하던 의병 활동의 기록, 그리고 왜군의 무기와 형장구, 의병들이 사용하던 장도 화승총, 창검류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 기념관 내부.
3차 반토벌전은 한 달 후인 2월16일에 치러졌다. 일본군 수비대는 의병부대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각오로 토벌 작전에 나섰는데, 정보 수집을 위해 한인 순사와 통역까지 배치하면서 '신돌석 생포 작전'을 계획했다. 당시 영릉의진은 일월산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일본군 의병토벌대는 6개 대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남북으로 길게 그물을 친 뒤 진형(陣形)을 유지하면서 동쪽 일월산으로 몰아붙이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영릉의진은 전투를 벌이는 척하면서 포위망을 뚫고 일월산을 빠져나갔다. 이 토벌작전의 실패에 관한 그들의 보고서를 보면 '준엄한 비탈에 절벽일 뿐 아니라 눈이 한 척 이상 쌓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관계로 제대로 추격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 이로써 신돌석은 일본군의 '신돌석 생포 작전'이자 3번째 토벌 작전을 완전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신돌석의진이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물리치자 일본군은 새로운 작전을 들고 나왔다. 1908년 3월, 일제는 신돌석의 부인 한재여를 안동으로 연행했다. 그들은 부인을 후하게 대접한 뒤 신돌석에게 전하는 글과 함께 돌려보냈다. 회유의 글임을 짐작한 신돌석은 펴 보지도 않고 불 속에 던져버렸다고 전한다. 그는 아버지와 처자식이 자신이 가는 길을 막는데 이용되지 않도록 칠보산 서쪽 기슭에 숨겼다. 일본군은 생포 작전도, 회유작전도 모두 실패했다.
신돌석은 4월에 들어 주로 평해, 진보, 영해 등 자신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의병을 모으고 군자금도 확보하였다. 음력 5월에는 울진에서 일본 경찰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남쪽으로 또 동쪽으로 이동하며 순식간에 치고 빠지는 공략을 펼쳤다.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있는 장군의 시비.
◆의병항쟁의 위축과 만주 망명 계획
1908년 후반에 들면서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크게 위축된다. '남한대토벌작전'을 위한 일본군이 계속 증원되었고, 일제는 의병이 귀순하면 죄를 면해준다는 '면죄문빙'까지 주며 의병들을 회유했다. 신돌석 장군에게는 현상금이 내걸렸다. 황금 1천근과 1만 호 고을의 조세권 등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일제가 작성한 '1908년 10월1일 폭도사 편집 자료'를 보면 '(신돌석이) 화적의 수괴가 되어 항시 수십의 부하를 두고 교묘히 체포를 벗어나 포악을 일삼고 폭도로 화해 혹은 독립하고 혹은 다른 집단과 연합하여 영양, 영덕 지방을 근거로 하여 본도 북부는 거의 횡행하지 아니한 곳이 없다. 그는 경찰대, 수비대, 헌병대에 의하여 토벌당한 일이 수십 차례였으나 실로 출몰이 자재(自在)하여 용이하게 체포되지 않고 지금도 오히려 영양 지방에 출몰하여 표도(剽盜)를 일삼으며 수십 부하를 두고 있다.' 그는 결코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병력이 대폭 축소되었고, 보급도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즈음 신돌석 장군은 만주행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당시 홍범도를 비롯한 여러 의병부대가 만주로 이동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독립군으로 재편해 나가는 것이 한국독립운동의 보편적 흐름이었다. 그의 속마음이 이병국의 문집에 전한다.
'3년여를 싸웠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었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밤 그대(신돌석)가 찾아와서 나에게 "지금 적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고 있는데, 총탄과 화살이 퍼붓는 마당에서도 죽지 아니하였던 내가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여러 강국에게 원통한 사실을 호소하여 응원을 얻음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1908년 영해, 영양, 평해, 안동 등 내륙을 넘나들며 투쟁을 계속해오던 신돌석 장군은 겨울이 오자 잠시 의진을 해산했다. 그는 전력을 보충하고 다음해 봄 새로운 투쟁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곳곳의 동지를 찾아다녔는데, 신돌석이 이병국을 찾아간 것은 이때로 보인다.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있는 장군의 기념비.
◆피살과 순국
1908년 12월11일(음력 11월18일), 신돌석 장군의 발걸음은 영덕군 북면 눌곡(지금의 지품면 눌곡리)에 이르렀다. 밤 9시쯤, 장군은 산 중턱에 자리한 옛 부하 김씨 형제의 집을 찾았다가 피살되었다.
세부의 내용은 분분하나 국가보훈부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의 내용을 취합해 보면 신돌석 장군은 '외가 집안 6촌인 김상렬(金相烈) 형제의 집에 네 시간 동안 머물렀고, 이후 집을 나오던 길에 김상렬 형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사망 시각은 1908년 12월12일 새벽 1시 무렵이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 일본 측은 신돌석 장군과 부하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들은 현상금에 눈 먼 자들의 잘못된 욕심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확신한다. 분명한 것은 1906년 4월에 창의하여 1908년 12월까지 2년 8개월 동안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오르내리며 활약한 태백산 호랑이의 허탈한 죽음이다.
신돌석 장군의 집은 일본군에 의해 최소한 두 번 불탔다. 첫 번째는 1906년 초 신돌석 장군의 의병군에 패한 일제가 '이곳이 신돌석의 집이다'라며 불태웠다. 두 번째는 1908년 4월 또다시 패한 일본군에 의해서다. 그들은 이미 불탄 빈터에 다시 불을 지르고 큰 이무기를 죽였다고 한다. 1940년에도 일제가 불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는 정치적 의도였다고 한다. 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잔여 세력은 1909년까지 곳곳에서 산발적인 항쟁을 펼쳤다. 일부는 만주로 떠났다. 이것이 영릉의진의 마지막인 동시에 영덕지역 의병의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장군의 옛 집은 말쑥하다. 그로부터 2㎞ 떨어진 고래산 자락에는 신돌석장군 유적지가 자리한다. 기념관에는 장군의 삶의 내력과 일제의 만행에 항쟁하던 의병 활동의 기록, 그리고 왜군의 무기와 형장구, 의병들이 사용하던 장도 화승총, 창검류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에는 호랑이 옷을 입은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본 이름은 태호, 돌석은 아명이며, 우리가 기억하는 장군은 유격전의 전설, 태백산 호랑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신돌석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