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윤 독립출판사 리와인드 대표
사람들 앞에서 시에 대해 종종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의 부족함과 무지함을 들킬까 봐 먼저 겁먹기도 했다. 준비했던 말은 목젖에 달라붙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아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뱉어놓고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생각보다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마주하면 즉석에서 지어낸 농담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마음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마음이 다칠까 봐 잡고 있던 탓일까?
이런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나는 달변가도, 코미디언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시가 내 편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가 내 편이라고 믿지 않았다면 먹은 겁에 체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아보지 않고 바라만 보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면서도 시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다. 눈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조차 시는 받아들여 줄 것이다.
'기침을 하자/젊은 詩人(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김수영 시인의 시 '눈'의 한 구절이다. '눈'은 4연, 16행으로 이루어진 시다. 짧다면 짧다고도 말할 수 있는 시인데 짧은 만큼 절제된 언어가 인상적인 시이면서 '눈'이라는 시어를 통해 시인이라는 존재를 잘 드러내는 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시의 전문을 읽어보면 평소에 시를 잘 접해보지 않은 사람도 시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얼핏 짐작해 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시를 읽는 사람이 가지면 좋은 태도, 시를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한 힌트도 발견할 수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는 사람이라면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이 흔적을 남긴 눈 위를 걸어보는 사람이 아닐까? 두려워하지 않고 우선 눈 위로 발을 뻗어본다면 시를 쓰는 사람이 흔적을 남긴 눈 위로 시를 읽는 사람의 흔적이 겹쳐서 이전과는 다른 눈이 될 것이다. 무엇이 옳은 눈인지 애써 해석하고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같은 눈이더라도 수십, 수백 명의 흔적이 닿는다면 그 눈은 각자 다 다른 눈들로 바뀔 테니까.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이 흔적을 남긴 눈은 아무런 흔적이 없는 눈보다 더러워졌을 수는 있어도 살아있는 눈처럼, 내 편이 된 시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시가 내 편이 된다고 해서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시적으로 바뀔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겨울이 오기 전에 흔적을 남겨보고 싶은 시 한 편을 찾아 가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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