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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사를 찾아서] 남한산성 망월사 주지 비구니 성법스님

2005-06-25

印서 받은 부처님 천골사리 안치 망월사 중건
안동 퇴계 이황 선생 15세 직계손, 명문대가 출가의 길…험난한 여정

[출향인사를 찾아서] 남한산성 망월사 주지 비구니 성법스님

깐깐해 보이는 외모에 자그마한 체구, 나이에 걸맞지 않게 풍겨 나오는 부드러운 당당함.

올해로 23년째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망월사를 지키고 있는 비구니 성법 스님(77)의 첫 인상은 기자를 주눅 들게 할 정도로 강하게 다가왔다.

어디선가 본 기억을 더듬어가며 합장의 예를 갖추자,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집을 버려야 해. 마음 속 교만함을 떨쳐버리란 말이야."

뜬금없는 질책에 어리둥절해진 기자가 멍하니 바라보자, 송곳 같은 질책이 날아온다.

"큰스님한테 일배를 하는 법은 없어. 원칙적으로 예를 갖춰 삼배를 해야 해."

얼른 일어나 다시 손을 모으자, 이제는 "괜찮다"고 하신다.

"난 불자나 신도들에게 일배만 하라고 해. 그러나 기본 예법은 알아야 한다는 게지. 불상이나 팔만대장경, 그리고 큰스님 앞에선 원칙적으로 삼배를 하도록 돼 있어."

망월사는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이지만, 주지(성법 스님)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가지 않는다. 짙은 화장에 단정하지 못한 복장은 절대 금물. 지나치게 짧은 스커트를 입었거나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이고 오는 사람은 면박을 주어 그냥 보내기가 일쑤다.

또한 이 절에서 이색적인 것이 있다면 태극기를 매일 게양한다는 것. 관공서처럼 펄럭이는 태극기가 낯설지 않다.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성법 스님의 가치관 때문인데 법어를 강의할 때도 올바른 국가관과 가정관은 자주 등장하는 주제라는 게 주변의 얘기다.

성법 스님이 이처럼 올곧은 성격을 갖게 된 건 그의 뿌리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법 스님은 진성이씨 가문 퇴계 이황 선생의 15세 직계손이다. 속명은 이동영. 1929년 안동 도산면 의촌동에서 이원직씨의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24세 되던 해 불가에 들어왔다.

어려서부터 '동궁비가 될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으며 내당 깊숙이에서 갖가지 수업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유가의 명문대가에서 출가란 상상을 초월한 일이었다.

그의 속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줄인다. 성법 스님 자신의 부탁도 있거니와 그 인연을 다하지 못한 속가의 이야기를 계속한다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아서다.

인터뷰에 들어가자, 성법 스님은 불사(佛事)에 바친 반백년 인생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제 80줄에 들어서 돌이켜보면 초년은 공부한다고 보따리 들고 왔다갔다 하고, 중년에는 외국에 다닌다고 허공에 다 뿌려 버렸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내가 안 해도 되는데 공연히 고려 때 절을 복원한다고 이곳에 들어온 지 벌써 20년이 됐네요."

1952년 출가한 성법은 오대산·치악산·김천 옥련암을 거쳐 30세 때인 58년 뒤늦게 건국대 동양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식모살이를 해가며 독학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택한 고행이었다.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과 함께 선천적으로 두뇌가 명석한 성법 스님은 대학 2학년 때 국내 최초로 유학고시에 합격, 홍일점으로 대만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성법 스님은 대만 문화대학을 졸업한 후 대만 불교 임제종에서 삼장법사(불교 경전인 경장·논장·율장을 모두 정통한 고승을 일컫는 말) 학위를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그는 인도·일본·네팔·스리랑카 등지에서 유학하며 조계종 순회대사를 지냈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70년 세계종교대회 한국대표로 인도를 방문했을 때 성법 스님은 간디 총리를 접견, 부처님 천골사리를 건네받게 되는데 이는 후일 성법 스님이 망월사를 복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때 들여온 부처님 사리는 현재 망월사 13층 화강암 석탑(진신사리 석탑)에 안치돼 있다.

그 이듬해 일본에 머무르게 된 성법은 퇴계 선생 비석 건립을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주자학자의 권위자이며 도쿄대 명예교수인 아베 요시오 박사가 그의 동양사 강의를 듣던 성법을 찾아가 퇴계 선생비 건립을 제안했고, 성법이 이에 승낙하면서 비석 건립이 본격 추진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아베 박사는 성법 스님에게 메이지(明治)시대부터 일본 학자들이 우에노 공원에 퇴계 선생비를 세울 땅을 마련해 놓고 있음을 알리면서 미루어온 사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베 박사는 퇴계 선생을 '제2의 공자'라 칭송할 만큼 퇴계의 사상과 학문에 영향을 받은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성법 스님은 "당시 간청에 가까운 그의 제의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회고했다.

이 사실은 그해 성법 스님이 귀국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다. 퇴계 선생 '현창비'는 2003년 11월 일본 우에노 공원에 세워졌는데, 당시 현지의 행사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그가 처음 망월사에 자리잡은 것은 82년경. 고려 인조 때 적을 막기 위해 세웠던 사찰 중 하나인 망월사는 6·25 직후 일본에 의해 불타버려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성법 스님은 호국승려들의 피땀과 눈물이 어린 망월사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무감이 발동했다.

각계를 돌며 망월사 중건을 역설했다. 그로부터 4년, 성법은 1986년 불임종으로부터 망월사 옛 부지 4천평을 구입했다. 당시 이 부지는 이교도들이 기도원 신축을 위해 구입하려 했는데, 성법 스님이 나서 설득 끝에 이를 막아냈다. 그 후 망월사는 88년 경기도로부터 지방문화재 11호(유적지)로 지정받았고, 문화부로부터 전통사찰로 제정됐다.

망월사 중건을 위한 첫 삽은 89년 뜨게 됐다. 총 100억원이 소요되는 대역사를 여성 혼자 몸으로 떠받치게 된 것.

성법 스님은 같은해 '남한지'에 의거, 동국대 문명대 교수에게 자문해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망월사 대웅전이 자리 잡았던 주춧돌을 비롯, 유물을 발굴한 성법 스님은 자료를 기초로 해서 망월사 복원 조감도를 작성했다.

그린벨트지역·산림보호구역 등 각종 법규로 인해 스님이 거주하는 요사채는 물론 법당까지 무허가로 고발과 철거를 수없이 당했다.

"봄·가을 1년에 두번 정도 뜯으러 왔습니다. 헐릴 때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성법 스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각종 법규를 공부해 대응하면서 망월사 터를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잠시도 늦추지 않았다. 이런 스님의 원력이 뜻있는 불자에게 알려지면서 마침내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14억원을 쾌척해왔고 복원공사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현재 망월사는 대웅보전과 극락보전이 고려양식으로 복원되어 조계종 비구니 수도원으로 등록, 운영되고 있으며 성법 스님이 인도 간디 총리로부터 직접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안치한 13층 사리탑 등이 웅장하게 들어서 있다.

그러나 중과부적. 지금까지 공사는 약 80%가 이뤄진 상태. "정말 힘든 작업은 이제부터"라고 성법 스님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중건자금은 성법 스님이 집필작업에서 얻은 인세·강의료·원고료로 충당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 작업도 한계에 달한 느낌이다.

"나, 주지 개인의 허세를 위한 불사가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산 교육장이며, 불교의 성지를 꼭 복원하자는 취지입니다."

성법 스님은 "사심없이 하는 불사이기에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뜻있는 불자의 적극적인 동참을 당부했다.

이 대목에서 성법 스님은 종교의 사회적 헌신을 강조한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종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국가와 가정을 우선하는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신론 강화' '화엄경 요해' '목련저자와 청제부인' 등 많은 저서를 펴낸 성법은 요즘 유서를 마지막으로 가다듬고 있다.

"결국은 누구든지 돌아가는 것은 틀림없어요. 왔던 자리는 가야 될 거 아닌가요. 우리가 조석으로 매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하지요. 아제아제 좋지요. 하지만 과연 아제가 되느냐 말이야. 이렇게 업식이 두꺼워가지고 수좌들이나 나나 죽는 것은 장담 못해요. 늙은이도 오래 살 수 있고 젊은이가 일찍 가는 수도 있으며 생사거래라는 것은 이상한거야."

진정한 열반을 강조한 것이다. 열반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덕을 바늘에 꿰듯 정립하는 일이다. 성법 스님의 말과 몸짓에서는 4덕을 꿴 산승의 내음이 물씬하다.

인터뷰를 하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자신이 쓴 '불정존승다라니경'을 건네주는 스님의 뒷모습에서 살아있는 부처님을 본 듯한 느낌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출향인사를 찾아서] 남한산성 망월사 주지 비구니 성법스님
2000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는 성법 스님.
[출향인사를 찾아서] 남한산성 망월사 주지 비구니 성법스님
1970년 인도를 방문해 간디 총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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