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바뀐 궁성의 저녁은
시도때도 없이 음악이 울려퍼지는데
가얏고 소리만 차츰차츰 멀어지니…
![]() |
가야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우륵박물관. 우륵과 가야금에 관련된 자료를 전시해 국악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전국 유일의 가야금 박물관이기도 하다. <영남일보DB> |
#1
예악을 바로 세워 개진하려는 가실왕. 그러나 왕의 가야 제세력 통합의지와 개혁추진이 자주 반대세력에 의해 간과되고 폄훼된다. 우륵은 위기를 느낀다. 왕의 명으로 가얏고 음악 12곡을 짓고, 이를 통한 제례악의 편제를 개편한 그 놀라운 변화에 대해 기대를 크게 가졌던 사람들이 벌써 그 기대를 잊었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예악에 대한 관심이 별로였는지 의문이 일 정도다.
“예악의 재정비 이후 변화된 게 무엇인가? 신라는 호시탐탐 우리를 넘보고 있고, 백제의 간섭은 갈수록 심해지는데, 예악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니까, 외세의 힘에 맞서 우리 내부부터 단합하자는 게 개혁의 핵심 아닌가? 예악의 정비는 그런 단합을 위한 기반이 되는 게야.”
“무슨 소리? 지금 정세를 보라. 예악을 새롭게 세운다며 법석을 떨었지만, 이후 가야사회의 통합과 안정의 희망은 더욱 흐려지고, 가야 제국의 시각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백제 사신들은 이제 공공연히 왕의 개혁의 핵심이 되는 예악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어. 더구나 가실왕과 개혁세력들이 신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구실을 붙여 협박까지 한다니까.”
“어쨌든 신라와 백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가야 나름의 변화가 내부에서 강력하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해. 예악을 새롭게 펼치는 것이 당장에는 실다운 것이 없는 듯해도 차츰차츰 가야의 정신을 수습하고, 하나의 정서로 통합하며, 자부심을 일깨우는 데는 분명 효력이 있을 거라 믿네.”
“현실을 직시하게. 일부 가야국은 이미 내부의 음악을 옛 그대로 되돌리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 백제의 눈치를 보는 게지. 효과가 미미한 예악 대신에 백제와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왜와도 손을 잡아 신라 세력을 견제하는 정책에 공을 들이는 게 더 실질적인 게 아닐까? 공연히 예악이니 뭐니 해서 우륵같은 악공이나 왕의 측근에 앉혀서 의논해봐야 공염불일 뿐이야.”
우륵에겐 매일 이런 소리들이 궁성 내외에서 들리는 게 가슴 아프다. 때로는 가실왕에게 좀 더 강력하게 개혁의지를 천명하여 지금의 상황을 과감하게 타개해야 한다는 건의도 하지만, 정책 추진에 자주 딴죽이 걸리는 상황에서 가실왕의 행동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어쨌든 우륵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왕과 함께 혼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가얏고를 안전하게 지키고, 이를 대가야 제례악의 중심 악기로 유지하는 일이다. 가얏고의 소리를 널리 전파하여 백성들의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그 기운을 북돋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할 일이라 여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얏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예악을 통한 개혁이 꾸준히, 간단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가얏고가 일반에게 가장 가까운 악기가 되고, 누구나 그 음률에 마음을 내고 흥을 느끼는 그런 날이 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은 얼마나 고되고 힘든 여정인가?
#2
갑작스럽게 가실왕의 승하 소식을 듣는다.
우륵이 궁성으로 들지만, 이미 왕의 시신은 왕실의 측근에 의해 둘러싸여 접근이 힘들게 되어 있다. 궁성 안은 삼엄한 경계령이 발령된 상태다. 우륵은 슬픔에 휩싸인다. 궁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악공들의 집무실에서 그는 새삼 가얏고를 쓰다듬으며, 비탄의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악공들이 그의 주위에 둘러 앉아 참담한 표정을 짓는다. 모두 왕의 승하가 몰고 올 후유증에 큰 염려와 걱정을 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가실왕의 측근에서 개혁의 선두로 활동해온 우륵의 앞날이 더욱 더 걱정되며, 그 여파가 자신들에게 어떻게 미칠지 저울질을 하기도 한다.
새로운 왕은 바로 공포된다. 도설지왕이다. 도설지왕은 가실왕의 장례절차를 의논하면서 정권을 장악한다. 도설지왕은 야심가의 모습을 바로 드러낸다. 당연히 개혁은 주춤한 상태로 중지되는 듯하다. 무엇보다 장례식의 음악에서 변한 상황이 바로 드러난다. 연주에서 가얏고의 역할이 현저하게 축소된 것이다. 우륵은 난처해진다. 연주를 앞두고 우륵은 그것이 전례에 없던 일이라고 항의했지만, 조정의 대신들에 의해 그 항의는 묵살된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요? 가얏고 이전의 음악은 전례가 아니랍니까?”
바로 전의 왕에 의해 만들어진 가얏고다. 그 비중이 왕의 사망으로 너무나 급히 현저하게 가벼워지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동안 가실왕의 개혁에서 소외됐던 조정 대신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세력을 새롭게 다지는 게 느껴진다. 덩달아 가야 제국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저마다 명분과 실리를 앞세워서 자기 주장을 관철하고,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한 암투가 벌어진다. 그러한 권력 투쟁의 일부가 앞서 벌어졌던 개혁의 무력화로 나타나고, 가실왕이 추진한 개혁의 핵심 역할을 했던 우륵에 대한 비판과 경시로 나타난 게다. 우륵은 앞이 캄캄해진다. 이 사건은 자신의 험난한 앞길을 미리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느낀다.
#3
“예악의 길이 왜 이리 갈수록 혼미해지는가?”
우륵은 탄식한다. 가실왕을 생각한다. 왕은 음악을 이해했다. 무엇보다 우륵의 음악을 이해하고, 함께 예악을 세워서 나라의 풍속을 가지런히 하길 원했다. 자신을 알아주고, 음악의 영원성을 확신하고, 우리의 소리를 내세우길 원했다. 가얏고는 그 상징이며, 그 밑바탕이며, 그 구체적인 확신의 징표였다. 그러한 확신을 실현하기 위해 왕은 개혁을 도모했다. 왕은 개혁으로 나라가 강성하게 가꾸어지길 바랐다. 가야 제국의 맹주로서 제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그리하여 백제와 신라와 당당하게 맞서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우륵은 그러한 왕을 존경하고 믿었다. 왕과 함께 큰 대가야의 꿈을 지피는데 신명을 다해왔다. 그러나 그 꿈은 문득 무너져버렸다.
“그래도 가얏고는 지켜내야 한다.”
우륵은 가얏고 지키기에 혼신을 다한다. 그러나 점점 더 그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는다.
“왕께서 찾으십니다.”
궁성에서 전갈이 온다. 왕을 배알한다.
“수고가 많소. 그동안 적조했소.”
“황공하옵니다.”
“그래, 곧 새로운 내각 구성에 따른 연회를 베풀려고 하니, 준비를 해주시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너무 무거우니, 좀 가볍게 해서 흥을 돋워주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연회이니 가볍게 가잔 말이오.”
연회가 저녁에 열리는 게 전에 없던 일이다. 문무백관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고관들이 주를 이룬다. 처음에는 의례적으로 ‘상가라도’가 연주됐으나, 차츰 가벼운 곡들로 바꾸어달라고 주문이 들어온다. 술판이 벌어지면서 여자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하여 왕을 에워싼다. 전에 볼 수 없던 음란한 분위기다. 연주에 대한 주문이 자꾸 들어온다. 결국에는 가얏고를 중심으로 한 곡 대신 가얏고를 만들기 전에 연주되곤 했던 곡들로 대치되는 소동이 벌어진다. 우륵은 아연실색하여 따지려 하나, 대신들이 막아서는 바람에 뒤로 제쳐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륵은 모욕감에 온몸을 떤다.
우륵은 늦은 밤 이문과 궁성을 나와 들판 너머 강가에 선다. 우륵의 눈에 눈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너무 황당하지 않으냐?”
“그러게 말입니다. 음악의 신성함이 모욕당했습니다. 음악이 음란의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아!아! 앞으로 닥쳐올 일을 어찌 감당할까?”
그날 이후 잦아진 도설지왕의 주연은 분위기가 더욱 농염해진다. 궁성의 저녁에는 시도 때도 없이 음악이 울려 퍼진다. 가얏고는 차츰 뒷전으로 밀린다. 그런 상황에서 악공들을 다독이고, 지켜봐야 하는 우륵의 마음은 천 갈래로 찢어진다. 이러다간 결국 우륵의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고, 아울러 가얏고의 존재가 부정되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사태가 빚어질 지도 모른다. 불길한 예감이 우륵의 마음을 휘감고 돈다. <계속>
글=이하석 <시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 고령군

박준상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