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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강원도 정선 정암사와 태백선 열차

2012-01-13

산비탈에 수직으로 선 탑 하나…풍경은 그렇게 먼곳에서 시작된다

강원도인가.
강원 땅을 지척에 둔 휴게소에서 입자가 다른 매서운 바람을 느낀다.
한겨울 강원도행은 더러 있었지만 늘 처음처럼 더럭 겁부터 난다.
북극에도 사람이 사는데, 히말라야에도, 몽골의 초원에도 사람이 살아.
이런 거창한 광경을 부러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다 강원도에 들어서면, 그 거대한 산들 속에서 사람의 집들을 발견하고,
촉각으로 다가오는 따스한 감정에 나른한 안도로 진정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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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백산 중턱 비탈에 서있는 정암사의 수마노탑. 보물 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선 정암사

급경사로 떨어지는 산비탈의 거뭇한 덩어리 속에 탑 하나가 서있다. 수목 가지 틈으로 산 너머의 태양빛이 노랗게 번져 오르고, 둥치 아래에 남아 있는 흰 눈이 옅게 빛나 내 눈 속에 탑을 세운다. 미리 저 위치를 예습하지 않았다면 쉬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탑 아래에는 적멸궁의 옆모습이 있고, 그 앞에 계곡을 경계 짓는 낮은 담장이 가로 놓여 있다. 작은 종각은 담장에 살짝 걸터앉아 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새로 지은 듯 나무의 보드라운 속살 빛을 그대로 지닌 목우당이 눈을 덮어쓴 채 무시무시한 고드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시선은 먼 곳에서 시작되어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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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탑에서 본 정암사 풍경.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걸음은 높은 석축으로 돋우어진 관음전 안마당으로 향한다. 요사와 정사 등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마당이다. 하늘이 열린 이 공간에 커다란 난로가 덩그러니 서있다. 따뜻하다. 사람들의 걸음은 잠깐 주춤하다 곧장 탑으로 향한다. 계곡을 건넌다. 열목어가 서식한다는 계곡은 흰 눈이 감추었다. 탑으로 오르는 산길은 계단이다. “싹싹, 쓸었네.” 한 아주머니의 감탄어린 음성에 뒷목이 쭈뼛 선다. 굽이굽이 산을 타고 오르는 계단을 세다 그만 먹먹함에 숫자를 잃는다. 까만 새벽을 뚫고 익숙한 걸음으로 싹싹, 하나하나 계단을 쓸었을 누군가의 수고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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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탑의 상륜부. 풍경과 청동의 상륜이 더없이 아름답다.

탑에 다다를 즈음, 저 아래로 절집의 평면이 펼쳐진다. 검은색과 흰색이 얼룩덜룩하다. 정선 정암사, 신라 선덕여왕 시절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탑은 자장율사가 용왕에게서 받은 마노석을 물길 따라 들여와 쌓았다 하여 물 수자를 더한 수마노탑이다. 이 탑에 석가여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한다. 모전탑은 늘 아름답다. 하나하나의 석재를 정교하게 마름질하여 정성으로 쌓아올린 탑, 쌓는다는 행위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석재 하나하나를 가만히 바라보면 오래된 수목의 검은 수피 속에 엉켜있는 세상의 모든 색채들이 스믈스믈 돋아 오르는 것 같다. 추녀의 풍령공과 풍령, 청동의 상륜과 병형의 목에서부터 드리워진 철쇄가 하늘과 바람만이 범할 수 있는 천녀처럼 곱다.


탑의 터는 매우 좁다. 방문객 모두가 그 주위에 함께 설 수 없을 정도여서 가장자리에 콕 박혀 잠시 시간을 가지는 것도 미안해진다. 한 사람이 탑돌이를 시작한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어느새 사람들은 물처럼 흐르고, 흘러 나간다. 그것은 놀랍게도 느리지만 막힘없는 흐름으로 탑을 에워쌌다. 그렇게 흘러, 다시 내려가는 것이다.


문 닫힌 적멸궁 안에서 나지막한 불경소리가 들려온다. 깊은 동굴 속에서 울려오는 음성 같다. 가볍게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위엄이 있다. 적멸궁 앞에는 자장율사의 지팡이였다는 주목이 한 그루 있다. 넓고 싱그럽게 펼쳐진 짙은 초록의 나무 꼭대기에 창끝처럼 솟구친 가지가 지팡이의 전설을 믿게 만든다. 사람들은 관음전 마당의 난로 곁으로 모여든다. 스님 한분이 다가와 함께 선다. “어디서 오셨나요?”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관음전에서도 불경소리 잔잔히 들려온다. 커다란 가마솥에는 무언가 끓고 있다. 공양 그릇을 오른쪽 어깨 위로 받쳐 든 보살님이 사뿐사뿐 적멸궁 쪽으로 걸어가신다. 저 위에 수마노탑에는 여전히 강물 같은 사람들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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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과 아우라지를 잇는 무궁화호 열차. 제천에서 태백(옛 황지)까지는 태백선, 민둥산에서 아우라지까지는 정선선으로 구분된다.
◆열차를 타고 수묵의 세계를 날다, 민둥산에서 영월까지

민둥산역사는 초등학교 건물 같다. 소읍의 관청 같기도 하다. ‘91년 신 역사 준공’이라는 연표를 보자 납득이 간다. 머리가 민둥한 민둥산을 바라보는 기차역, 사람들에 기찻길을 쫓아 정취에 취하고 역무원은 쫓아 나와 취한 이들을 깨운다. 봐앙-, 짤막한 무궁화 호 열차가 천천히 도착한다. 제천과 아우라지를 오간다는 푯말이 걸려 있다. “이렇게 낡은 기차는 처음이야.” 한 아가씨가 애정 어린 음성으로 말한다. 다섯 정도의 승객이 전부였던 객차가 한 무리의 여행객으로 잠시 벅적해진다. 영월로, 간다.


“어디서 오셨나요?” 역시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래는 구절리까진데 아우라지까지만 가고 폐선됐지요. 구절리까지는 레일바이크가 생겼고. 옛날에 구절리엔 초등학생이 600명이 넘었지.” “600이 뭐라 900은 넘었구만. 지금은 대여섯뿐이라.”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할아버지가 나서자 대화는 이내 회상의 장단이 된다. 여행객들은 옛 이야기 듣듯, 두 강원도 할아버지의 장단에 조용히 귀 기울인다.


민둥산역의 원래 이름은 증산역, 바뀐 것은 2009년이다. 강원도의 열차는 석탄으로 대표되는 지하자원을 운송하는 산업선이었지만 점차 그 역할이 줄어들면서 새로운 목표로 나아가게 된다. 일출, 단풍, 억새, 온천 등을 열차와 연계한 관광산업이다. 증산역의 개명은 이러한 관광 산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영업중지나 폐선 등 이 구배 많은 기찻길만큼 질곡 많은 강원도의 기차는 여전히 산업선이다.


창밖은 거대한 산과 자그마한 촌락들의 수묵화다. 가끔 카지노를 앞세운 호텔들이 머쓱하게 솟아 있다. 구배 심한 철로를 기차는 천천히 달린다. 마치 날개를 쫙 펴고 활공하는 새처럼 달린다. 거짓말처럼 따뜻한 햇살이 열차 안에 가득하다. 재잘대는 어린아이들의 소리마저 잠긴다. 편안한 이에게 기대어 소록 잠드는 오후처럼 나른하다. 행복하고 안온하게 몸을 놓아버릴 수 있는, 느리게 나는 기차다.


>>>찾아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제천 IC에서 내려 38번 국도를 타고 사북, 고한 방향으로 간다. 두문동 터널 지나 상갈래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정암사다. 정암사에서 나와 상갈래 삼거리에서 영월, 사북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증산 교차로에서 민둥산 역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정암사에서 민둥산역까지는 약 20분, 기차 타고 영월역까지는 30분이 조금 넘는다. 기차요금은 2천600원, 평일에는 8회, 주말에는 9회 운행하기 때문에 시간을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20120113
공양 그릇을 오른쪽 어깨 위로 받쳐 든 보살님. 공양물에 콧김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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