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병든 歷史를 위해 ‘역사의 십자가’ 지고 가야”
요즘 정치 보면 與가 野로, 野가 與로 이름만 바뀔 뿐 세상은 바뀌지 않더라
장남은 계엄군에 죽고 차남은 감옥에 가고…의로운 일 했다지만 내 자식의 일이라 참담
혁신정치운동 등으로 두번이나 끌려갔지만 양심적인 형사 있더라
98년부터 신협 관여…없는 자 위한 금고죠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
천직이거나 천명을 받은 이의 인생행로도 태풍의 눈같다. 그 눈의 동중정(動中靜)은‘정중동(靜中動)’을 전제하고 있다. 실천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육신이 실천 그 자체다. 그래서 말조차 극도로 자제한다. 예수가 ‘사랑 캠페인’을 하겠는가. 부처가 ‘자비 슬로건’을 내걸겠는가. 이미 사랑이고 자비이기 때문이다.
류연창 전 대봉성결교회 목사(85).
이미 삶의 격류를 지나온, 그래서 추수 끝난 들녘처럼 보였다. “노인네한테 무슨 얘기를 들을 게 있느냐”면서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도 했지만, 취지를 얘기하자 공감했다. 자신의 사랑방같은 서대구신협 이사장실로 기자를 불렀다. 그는 지금 그곳의 부이사장이다. 순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민주인사가 무슨 신협….’ 그건 무지의 소치였다. 신협은 여느 금융기관과 달리 공동체 정신이 각별하고 사회주의 정신이 짙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다들 류 목사를 지역 기독교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사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인권운동체 격인 KNCC(기독교인권위원회) 대구지부를 83년에 만들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창립되기 전이었다. 19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갈 때 혁신계로 분류됐던 반체제 모임인 민자통(민족자주평화통일회의) 대구 대표도 맡아 옥고를 치른다. 2004년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간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뒤를 잇기 위해 생긴 한국인권행동의 공동대표를 대구 마하사 재원 스님과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진관 스님, 최학래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과 함께 맡고 있다.
‘대구의 문익환’같다. 일선에서 물러난 그를 굳이 지면에 모신 이유는 그가 성직자이면서도 자유·정의·사랑을 실천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장남은 광주민주화항쟁 때 잃었고, 둘째 아들도 감옥에 갔고, 자신도 두 번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 유신체제에 저항한 반체제 설교
류 목사는 71∼81년 전남 광주 신광교회에서 시무 목사로 활동했다. 기독교교회협의회(ACC) 광주지회장이기도 했던 그는 가장 반체제적인 설교를 한다.
“운동권 학생들이 내 설교를 들으려고 몰래 교회 안으로 많이 들어왔어요. 정보 형사 2명이 한 조가 되어 매일 나를 감시하죠. 그래도 난 자유와 정의의 정신에 반하는 유신헌법을 맹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부당한 통치자가 리드해선 안된다. 잘못된 유신헌법으로 인해 국민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고 말했죠.”
- 잡혀갔겠네요.
“성령 때문인지 잡혀가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 76년 8월 공안당국이 끌고가더군요. 고문기술자였던 그들도 내가 목사라서 그런지 물리적 고문은 가하지 못하고 대신 정신적으로 고문을 가했습니다. 잠을 재우지 않았어요. 희한하게 한 형사가 들어오더니 서울대 출신의 자기 동생도 운동권이라면서 잠을 푹 자도록 배려를 하더군요.”
- 재판 때 법관에게 무슨 발언을 했습니까.
“이상하게 우리 사법 당국은 징크스가 있습니다. 신부는 안티 기질 탓인지 상대적으로 목사보다 잘 못건드려요. 집단적 반발이 기독교보다 가톨릭이 더 세다고 판단한 모양이죠.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도 나 때문에 꽤 골치가 아팠던가 봐요. 스위스 제네바 국제 ACC 총무까지 나를 면회왔으니…. 유신헌법을 지지한다는 말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회유를 하길래 제가 웃었어요. 재판 때 나도 모르게 판사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발언을 했어요.
‘당신들이 나를 재판한다고 하지만 훗날 역사가 당신을 심판할 것입니다’라고.”
누구도 고집과 소신을 꺾지 못했다. 그는 미결 상태로 4개월 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 자식 잃고 대구로 온다
-대구로 와서 처음 한 일은 뭔가요.
“81년 대구로 왔어요. 대봉성결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습니다. 방송에서 연일 광주사태를 왜곡보도하길래 진실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였겠죠. 둘째 아들(동인)도 장남처럼 불의를 보지 못하더군요. 뉴스가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하자 이에 격분, 친구 두 명과 함께 대구 모 방송국 사옥에 화염병을 투척했습니다. 2년 이상 대구·청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참, 말이 아니네요. 부자간에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글쎄요….”
-인권과 부자지정의 힘이 충돌하게 됐네요.
“첫째 아들은 죽고, 둘째 아들은 감옥에 가고…. 자식이 비록 의롭고 바른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갔지만 막상 내 자식의 일로 다가서니 참담하더군요.”
-둘째 아들은 후에 어떻게 됐죠.
“이미 세속적 성공과 출세는 불가능해졌어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제대로 취직도 할 수 없었어요.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성주에서 돼지를 키우고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옥고는 언제 당하죠.
“대구에 오니 인권은 바닥인데 인권운동체가 없어 대구기독교인권위원회(KNCC)를 만들었어요. 곧이어 61년에 만들어진 혁신정치운동체인 민자통을 부활시키기 위해 대구 초대 민자통 대표를 맡았어요. 한밤중에 서울 남산으로 끌려갔어요. 그런데 며칠 있으니 양심적인 한 책임자가 내게 성경의 한 구절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하더군요. 내가 헤라어로 대답해주자, 그가 ‘선동과 데모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놀랐다’면서 나를 석방시켜주더군요.”
(함종호 체인지 대구 상임대표는 “그 시절 그런 혁신계 정당체의 대표를 맡을 만한 분은 몇명 되지 않았다”면서 류 목사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이후 류 목사는 17년간 설교를 통해 올바르지 못한 세상에 저항했다. 오완호 한국인권행동 사무국장 등 지역의 상당수 운동권 학생이 봉산교회에서 류 목사의 힘있고 정의로운 설교에 큰 위안을 받기도 했다.)
-대구가 ‘인권의 도시’라더군요. 목사님도 지역 인권운동 확산에 기여를 많이 했죠.
“80년대초 숱한 목회자가 있었지만 속으로는 군부정권이 사라져야 된다고 믿으면서도 자신이 어쩌지 못할 현실 때문에 체제순응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임에 나가기도 하지만 모두 깊은 얘기를 꺼리더군요. 나를 경계한 거겠죠.”
-신협 일에는 어떻게 간여하게 됐죠.
“신협은 없는 자들을 위한 금고입니다. 독일의 철도공이 스스로를 위해 만든 품앗이 은행에서 유래된 겁니다. 가난한 노동자가 쉽게 대출받을 수 없어 자구책으로 만든 두레같은 은행이죠. 98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뒤 신협에 간여하고 있습니다.”
◆ 류 목사의 자유와 정의론
-자유가 뭡니까.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자유까지 막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유하는 존재’입니다. 국가권력이 그걸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죠. 자유만 맹목적으로 주면 방종으로 흘러 통제하기 힘들어집니다.”
-정치는 안 변하는 것 같은데 정치인은 왜 변하죠.
“정치에 몸을 던지면 그 정당체의 구도와 동고동락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소신이 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후원회장 역할도 하셨는데 그의 자살을 어떻게 봅니까.
“그에게 공자의 말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국가의 CEO가 되면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족식(足食)·족병(足兵)·민신(民信)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민신이죠.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설파했습니다. ‘지도자는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 군림하는 게 아니라 섬기는 자가 지도자다.’ 일국의 대통령은 역사가 병들었다고 하면 역사의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묻혀야 합니다. 결국 그의 자살도 그런 차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식까지 저 세상으로 보냈는데 요즘 정치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고 그냥 여당이 야당, 야당이 여당으로 바뀔 뿐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더러 뭐라고 하죠.
“내가 장남을 떠올릴 때마다 둘째는 사람은 한번 왔다 가는 것, 그래도 역사발전에 공헌했으니 아버지는 그걸로 위로 받으라고 하더군요.”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장남 “병든 역사를 위해 십자가 지는 사람 있어야”…광주항쟁 때 숨져
류연창 목사는 솔직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장남 동운씨가 열사가 된 내력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담담한 표정으로 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증언했다.
5월27일 오전 2시 전남도청. 시민군에게 실탄이 지급된다. 계엄군과의 일전을 각오한 시민군 150여명은 결사항쟁을 맹세한다. 그 자리엔 광주 동신중과 진흥고를 졸업한 22세의 동운씨도 있었다.
한신대 신학과 2학년이던 동운은 광주 신광교회(현 신광성결교회) 시무(視務) 목사였던 아버지로부터 광주 소식을 접하고 일부러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온다. 시위 현장에 갔다가 계엄군한테 잡혀 이틀간 죽도록 맞다가 집으로 온다. 동운은 친구 형님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후 곧장 도청으로 간다. 거기로 못가게 붙잡는 아버지에게 비장한 인사말을 올린다.
“아버지, 다른 집 자녀는 다 희생당하고 있는데, 왜 저만 보호하려고 하십니까?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평소 ‘예수의 십자가가 주는 진리’라는 류 목사의 소신이었다.
대문을 나가며 동운은 “아버지, 절대 소신이 변해선 안 됩니다”라고 당부한다.
동운은 ‘한 줌의 재가 된다면 어느 이름 모를 강가에 조용히 뿌려다오’라는 글을 일기장에 남겼다. 그는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일하며 시신 찾는 일을 맡았다. 끝내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청 쪽에서 계엄군의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흘 뒤 동운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관 속에 있는 아들의 시신은 검게 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7년 기독교인들이 광주시 남구 구동 신광성결교회에 고 류동운 열사 추모비를 세워준다. 류 목사도 참석했다. ‘누군가 병든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생명은 참답게 부활한다’는 동운의 마지막 유언이 시인 박남준의 글씨로 추모비에 새겨진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류 목사의 지상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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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이가 많습니다.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외쳐댑니다. 교인은 영광의 자리만 원하지 고난의 자리는 피해갑니다. ‘말세다. 종말이 왔다. 거짓이 진실을 죽이고, 악인이 의인을 죽여서 득세하는 종말의 시대가 됐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과연 이럴 수 있느냐’면서 통탄해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침묵하는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이며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가 열립니다. 진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가 있어야 진리가 살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이가 있어야 사랑이 살고, 정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가 있어야 정의가 사는 것입니다. 부활과 복음은 고난과 십자가를 전제로 합니다. 이게 주님이 설파한 생명의 진리입니다. 이게 역사발전의 법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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