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따뜻이 대해줘…해인사와 고령 덕에 내 지친 심신 치유…
대가야문화 흠뻑 빠져…가야산도 100번 올라
난 北설득할 장점있어…인천 아시안게임 때 참가할 수 있도록 노력
방송 등 문화교류 통해 신뢰 쌓는 가교 될 것
정치적 지역구도 문제…생활 속에 다가서는 신뢰받는 정치인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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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째 고령에서 살고 있는‘통일의 꽃’임수경씨가 지난달 27일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대가야고분군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씨는“비례대표 턱걸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게 대가야의 산신령 덕분”이라며 활짝 웃었다. |
꽃이 세상을 바꾼다?
미국의 식물학자 윌리엄 버그의 책 ‘꽃은 어떻게 세상을 바꿨을까’(2010)에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26만여종의 꽃식물은 인간을 진화시키는 촉매제라고 본다.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로 사랑을 받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생명과 희망을 상징한다.
임수경(43).
사람들은 임수경을 ‘통일의 꽃’으로 부른다. 1989년 여대생이었던 그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으로 분단 이후 민간인으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해 45일간 머물다 공개적으로 판문점을 거쳐 귀환했다. 하지만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3년4개월간 복역했다.
분단의 현실을 세상에 절절하게 알렸던 그는 99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복권이 됐다. 그러나 그해 이혼과 함께 외아들을 사고로 잃는 큰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 박사과정 진학과 유학으로 학문에 정진했다. 또 합법적으로 몇 차례 방북을 하면서 남북간 민간인 교류에도 앞장 서 왔다.
2006년부터 임수경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령군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고 있다. 그는 지난 4·11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통일의 꽃’에서 다시 서사적인 삶, ‘통일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인터뷰는 그가 살고 있는 고령읍내의 한 식당에서 진행됐다. 총선에서 낙선한 벗(낙엽이라고 했다)과 동네주민도 합석했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언변. 그러면서도 균형 감각이 있었다. 낙선자를 챙기고 위로하는 마음씀씀이, 여유와 유머도 갖췄다. 가녀리고 앳된 꽃의 이미지와 달리 임수경은 백두산 천지에 피는 두메양귀비처럼 거친 비바람을 이겨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처럼 변해있었다.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소감은 어떠한가. 또 앞으로의 각오는.
“잠이 안 온다. 당을 비롯해 저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겁다. 국회에 등원하면 최선을 다해 우리 시대의 소중한 자산과 가치를 이어가겠다. 당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남북관계, 남남갈등이 심화된 시점에 소통과 화합이 절실하다. 약속을 잘 지키고 믿음을 드릴 수 있는 정치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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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기 직전 남한으로 귀환하는 모습. |
-국회 상임위원회는 어디로 갈 건가. 일각에서는 외교통상통일 위원회로 갈 것으로 점치던데.
“어느 상임위원회를 가도 남북교류와 관련한 일은 많이 있다. 지금으로선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를 희망한다.”
-왜 그런가.
“방송위원회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방송교류의 중요성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금강산 관광의 길도 다시 열어야 한다. 2014년에는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는데 북측 선수와 응원단이 올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겠다. 일본, 프랑스 등 외국에 빼앗긴 문화재 환수 문제와 복원도 중요하다. 민족의 문화유산보존을 위해선 남북이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 또 대학원에서 언론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언론전문가로서 현재 당면한 언론 정책과 문제점을 입법화하는데도 노력하겠다.”
-89년 북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낌은 어떠했나. 당시와 비교해서 남북관계가 어떠하다고 생각하나. 또 현재의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을 때 엄청나게 많은 인파에 놀랐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 신발 한 짝이 벗겨지기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남북이 해빙기를 맞이하는 듯 했으나, 지금은 다시 냉전이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으로, 서해 직항로로, 제3국을 통해 교류를 했다. 하지만 서로간에 신뢰가 없이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북이 최근 지도체제가 바뀌었지만 우리는 어떠한 공식적 통로와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남북이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대화와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
-89년 이후 북한에는 몇 번 갔나. 또 가서는 무슨 역할을 했나.
“2001년부터 2004년까지 8·15 남북공동행사 참가 및 방송위원회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 회담 등으로 4차례 더 방북해 합법적 테두리에서 교류를 지속해왔다. 교류위원으로 있으면서 지상파 4사 및 케이블방송이 참여한 남북방송인토론회와 남북영상물교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국회의원으로서 향후 남북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할 건가.
“문화교류 협력을 통해 서로간의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 19대 국회는 남북 관계의 복원과 한반도에 평화를 심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그것이 민생을 안정시키고 공존 공생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의 꽃’으로 상징되는 이미지를 뛰어넘어 실질적인 통일 일꾼으로 남과 북을 잇는 가교가 되고 싶다.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외교에 있어서 상대방이 알아보고, 환영하고, 믿음을 주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한지 그 중요성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시간적·인적·물적 소모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기여하고 싶다.”
-지난 총선기간 동안 지원유세를 했나. 이번 선거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나.
“대구에서는 중-남구에서 민주통합당으로 나선 김동열 후보에 대한 지원유세를 했다. 대구지역에 출마한 같은 당 후보를 위한 지원유세도 생각했지만 내가 나서면 오히려 표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당이 1당을 목표로 선거에 임했지만 아쉽게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의석수에서는 뒤지지만 성과가 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태어난 걸로 알고 있다. 고령에는 어떤 계기로 오게 됐나.
“맞다. 김구 선생의 사저였던 경교장이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으로 바뀌면서 ‘고려병원 1호아기’로 태어났다. 평양에도 가는데 고령엔들 왜 못 오겠나(웃음). 해인사가 좋아 오게 됐는데 고령과 고령사람들에게 정이 들었다. 지리적으로도 합천보다 고령이 해인사와 훨씬 가깝다.”
-해인사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법명이 있는가.
“해인사 큰절에서 1년 넘게 살았다.(임씨는 2007년을 전후해 해인사 대비로전 불사 기획홍보위원을 했다. 또 월간 ‘해인’기자로 활동했다) 당시 불교철학과 교리를 접하면서 시련을 극복하는데 힘을 얻었다. 공덕을 쌓으라는 의미로 ‘공덕주(功德主)’라는 법명을 받았다. ‘덕’자를 빼면 일명 공주다.(웃음) 해인사 대비로전 부처님 복장 내에는 재가 불자로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과 내 이름이 들어있다. 몇백년 후 부처님 복장이 다시 개봉될 텐데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고령에 보금자리를 잡은 지는 얼마나 됐나. 또 고령에서 살아보니 어떤가.
“자리를 잡은 지는 6년째다. 중간에 오스트리아에 유학도 가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서울에서 사람들과 일정에 쫓겨 여유 없이 살다 고령에 오니 너무 좋았다. 산천초목도 아름답고 대가야문화와 역사에 흠뻑 빠졌다.”
-이웃들과의 관계는.
“심신 치유와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다 보니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친해지지는 못했다. 청년층들을 중심으로 조금 만나고 있는데 앞으로 더 여러분과 친밀하게 지내려고 노력하겠다. 이웃들이 많이 도와준다. 김장도 같이 하고, 주민자치위원들과도 가까이 지낸다.”
-고령에서 계속 살 것인가.
“국회에 등원하면 아무래도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해야 할 테지만 고령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갈 것이다. 정말 고령을 좋아한다.”(그는 진심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대구·경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서울내기’라 처음 고령에 왔을 때 적응이 될까 다소 걱정을 했지만 주민들께서 정말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뿌리 깊은 지역 구도는 문제다. 생활 속에 다가가서 신뢰받는 정치인으로 거듭나야 할 과제가 남았다.”
-일상생활이 궁금하다. 취미나 여가를 어떻게 보내나.
“휴대폰 전화번호 끝자리가 ‘1433’이다. 가야산 정상 칠불봉이 1천433m인데 그걸 생각하며 만든 번호다. 가야산을 100번도 넘게 올랐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시간 날 때마다 산에 다니고, 책 읽고, 글 쓰고…,’ 때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자기 수양의 좋은 방법이다.”
-‘통일의 꽃’이란 닉네임이 늘 따라다닌다. 그러한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없었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받아들인다. 얼마 전 소설가 서해성 선생님이 이런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임수경은 그냥 임수경이다. 결코
다른 말로 부르지 말라. 임수경
은 그날 이후 늘 임양이다. 시집
을 가도, 할머니가 되어도 임양
이다. 그는 하루로 이미 전 일생
을 다 살아낸 통일의 꽃이다. 저
주였던 통일을 꽃으로 바꾼 민족
이 쏘아올린 아름다운 화살이다’
나는 정치적 야심이나 욕망에 사로잡혀 입신양명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만 스무 살 때부터 공적·사회적 인물로 살았고, 역사와 시대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자연스럽게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다. 지난 시기 남과 북, 해외동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들에게 과분한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생생한 역사의 산 증인으로, 미래를 함께 이끌어갈 통일의 일꾼으로, 위기의 한반도를 평화와 희망으로 이끄는 데 임수경이라는 인물을 유용한 자산으로 활용해주면 좋겠다.”
글·사진=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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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당선자 임수경씨가 고령읍내 한 식당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임수경
1968:서울 출생
1986:진명여자고등학교 졸업
1993:한국외국어대 불어과 졸업
1997: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1999:미국 코넬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과정
2002: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졸업
2003: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 박사 수료
2009:오스트리아 유럽평화대학원(EPU) 졸업
1990:국제사면위원회 (Amnesty International) ‘세계의 양심수’ 선정
2003~2005:월간 해인 객원기자
2007:해인사 대비로전 불사 기획홍보위원
2002~2010: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강사
2009~2010: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외래교수
2012:민주통합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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