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 걸려 피 엉겨 붙어도 열일곱의 난 일본軍을 받아야만 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18세 때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한 서울시민이 선물한 것이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
최근 잇단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나라 안이 시끄럽다. 극단적인 패륜범죄라서 그런지 사형제 집행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성범죄자에게 전자발찌 대신 몸에 칩을 집어넣자는 제안까지 등장할 정도다.
개인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해선 국가가 벌을 줄 수 있지만, 국가가 저지른 성범죄에 대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국가도 사형을 시키고 전자발찌를 채우든지 해야 옳은 게 아닐까.
하지만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은 버젓이 살아 있는 60여명의 강제종군위안부를 두고도 ‘그런 일 없다’ ‘자발적으로 원해 위안부가 됐다’는 등 시치미를 떼며 망언을 일삼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 등 유엔기구도 이에 대해 유구무언이다.
이용수 할머니(84).
2차대전 막바지 17세 때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2년간 대만 등지에서 짐승보다 못한 강제위안부 생활을 했다. 광복 후 귀국해서 포장마차, 술집 등을 전전하면서 가난과 이혼, 질병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 할머니는 강제위안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는 영화에 출연했고, 미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위안부 결의안 처리 등을 요구했다. 또 일본의 야만성을 규탄하는 국내외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올해 열린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지난 6일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의 한 서민아파트에서 이 할머니를 만났다. 33㎡(10평) 남짓한 좁은 방에는 에어컨도 없다. 방 한켠에는 2009년 한 서울시민이 그려준 18세 젊은 날의 초상화가 있다. 곱고, 수줍은 모습을 지녔다.
이 할머니는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를 즐겨 부른다.
‘…행복했던 장미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 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떠 나지 않으리라…’
이 할머니는 슬픈 민들레처럼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 간난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다시 조국을 찾았지만 할머니에게 남은 건 상처와 아픔뿐이다. 그럼에도 조국을 향해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겠다고 한다.
집 마당서 끌려가…전기고문 당해
지금도 가끔 분해 심장 찢어질 듯…
위안부 대신 강제위안부로 불러라
日王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문제 南北 조율도 방해 말아야
작년 쓰나미 보니 벌 받는다 생각
독도를 못 지키면 날 욕보이는 거야
市, 강제위안부역사관 건립 관심을
당당하고 기 안 죽는 나라서 살고파
지난 3월14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 1013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위한 수요집회’에서 이용수 할머니(앞줄 왼쪽)가 소녀상 옆에 나란히 앉아 있다. 연합뉴스 |
2007년 4월26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열린 ‘아베 총리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 인정과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집회’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여름 무척 더웠다. 에어컨도 없는데 힘들지 않았나.
“여름과 겨울이 특히 힘들다. 하지만 에어컨이 없어도 선풍기가 있지 않나. 매년 체력이 조금씩 떨어져 그게 걱정이다.”
-어떻게 생활하나. 아픈 데는 없나.
“사는데 크게 불편한 건 없다. 혼자 영화도 보고 여행도 한다. 어제는 찜질방에서 하루 종일 놀다 자고 왔다. 찜질방 안에 있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이 나이에 안 아프면 그게 이상하지만 어릴 때 끌려가 폭행당했던 데가 특히 쑤신다. (무릎에 있는 흉터를 보여줬다) 그런데 가끔 굉장히 분해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플 때도 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 모진 고난을 당했는데 당시 상황은.
“대구에 있는 집 마당에까지 일본군이 들어와서 끌고 갔다. 기차를 타고 경주~평안도 안주~중국 다롄까지 갔는데 거기서 군함을 타고 상하이~대만으로 갔다. 중간 중간에 또래 여자를 태웠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기도 했다. 안주에서 동료와 탈출을 시도하다 동료가 죽도록 얻어맞았다.”
-위험한 고비는 없었나.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인지 폭격인지 모르겠다. 쾅쾅거리는 소리에다 배가 심하게 흔들려 계속해 멀미가 났다. 화장실로 가서 구토를 하고 있는데 일본군이 뒤에서 달려들었다. 일본군인의 팔뚝을 깨물었는데 군인이 실신할 정도로 마구 때렸다. 피투성이가 돼 엉금엉금 기어 선실로 나왔는데 다른 여자 아이가 일본군한테 겁탈을 당하고 있었다. 철이 없어 그때는 서로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대만에 도착해선 어떠했나.
“좁은 방이 20개쯤 되는 2층집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일본군을 받았다. 인정사정을 두지 않았다. 성병에 걸려 복부에 가래톳이 생기고 피가 엉겨 붙은 때도 있었다. 그래도 주사를 맞으면서 일본군을 받아야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전기고문도 했다. 나 말고 조선여자가 10명쯤 있었다. 난 거기서 ‘도시코’로 불렸다. 기억하기도 싫은 지옥 같은 날들이었다.”
-어떻게 빠져나왔나.
“전쟁이 끝난 사실을 누가 가르쳐 줘 광복이 된 걸 알았다. 일본군이 군위안소에서 수용소로 데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왔다. 기차를 타고 대구로 왔는데 또 잡아갈까봐 기차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었다.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나를 못 알아봤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 할머니는 1997년, 1998년 대만현지를 답사했다)
-위안부라는 말 대신 직접적인 표현으로 ‘성노예’라는 용어를 써야 된다는 주장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정신대니 위안부니 다 일본이 정한 거다. 일본은 조선에서 가져갈 것 다 가져가고, 꺾을 것 다 꺾었다. 우리가 일본에 스스로 간 건 결코 아니다. 강제로 끌고 가 욕을 보였다. 줄여서 위안부, 위안부 하는데 정확히는 ‘일본군강제종군위안부’가 맞다. 강제라는 말을 반드시 써야 한다. (언론에도 부탁했다)”
-최근 한 일본인이 강제종군위안부 소녀상에 말뚝테러를 해 고소를 했는데.
“소녀상은 강제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징이다. 나와 우리나라를 모욕한 것이다. 내가 법적대응을 하자고 주장했다. 아직까지 일본이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에 다녀왔다. 간 사실을 두고 말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잘 갔다 왔다. 속이 시원하더라. 그 이전 대통령들도 진작 갔다 왔어야 했다. 우리 땅인데 당연히 가야지.”
-이 대통령이 일왕이 사과하면 한국에 올 수 있다고도 했다.
“일왕은 천황이 아니다. 천황은 하늘에 살아야 하는데 일왕은 땅을 밟고 산다. 하늘에 살면 안 빌어도 되는데 땅에 살기 때문에 침략행위에 대해, 강제위안부에 대해 무릎 꿇어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
-독도에 가본 적이 있나.
“2010년에 울릉도도 보고 독도에도 갔다. 독도에 내려 ‘독도님 미안합니다. 가만히 있는 독도님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하면서 펑펑 울었다. 내가 독도고 독도가 용수다. 독도를 못 지키면 용수를 또 욕보이는 거다.”
-지난해 일본에 쓰나미가 발생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한국에서도 도움을 줬는데.
“일본국민들이 불쌍하더라.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데 일반 백성이 무슨 죄가 있나. 죄는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죄는 지은 데로 가고 공은 닦은 데로 간다. 일본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지진이 일어난 뒤 재판 때문에 일본에 갔다. 재판정에서 증언에 앞서 ‘죄는 밉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올해 민주통합당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신청했다 탈락했는데 섭섭하지 않나.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이 연세가 많고 살아계신 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건강이 허락해 피해자할머니를 대표해 행사에 자주 참석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직접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비례대표를 신청했다. 섭섭한 건 없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다음에는 지역대표로 출마하고 싶다.”
-경북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고 들었다.
“국제법을 배워 직접 강제위안부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사회교육원에서 명예 대학생으로 7년간 공부했다.”
-강제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보는데.
“맞다. 2000년 평양에 9박10일간 가서 북한의 종군위안부들을 만났다. 왜 강제위안부 사진 중 임신을 해 배가 불룩한 여자가 있지 않나. 그 여자가 박영심이란 할머닌데 지금 살아있겠나 모르겠다. 남북이 배상문제에 한 목소리를 내면 좋은데 일본이 늘 방해한다.”
-대구의 예술인과 시민단체회원 등이 일본군강제위안부 역사관을 짓는다고 한다. 역사관이 필요한가.
“늦게 시작했지만 반드시 지어야 한다. 대구시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역사, 수난의 현장도 기록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을 주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미국 뉴저지에는 강제위안부기념비가 있다.”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도움을 받았나.
“강제위안부의 실상을 알리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 많다. 대구에서는 문희갑 전 대구시장 부인이 기억난다. 명절이나 생일 때 식사초대도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황대현 전 달서구청장도 잘 해줬다. 곽대훈 현 달서구청장, 곽동협 곽병원 원장, 최봉태 변호사 등이 살가운 사람들이다.”
-형제자매는 없나.
“오빠가 한 명 있고 남동생이 4명이다. 오빠는 11세 때 일본에 가서 고학을 했다. 공부를 하고 귀국해 만주 봉천(현 요녕성 심양)을 왔다 갔다 했다. 한번은 ‘왜 만주에 가느냐’고 물으니까 ‘조선을 찾으러 간다’고 하기에 조선이 무슨 물건인 줄 알았다. 어릴 때 서커스도 같이 구경가고 사이다도 사 줬는데 지금 생각하니 오빠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 같다. 광복이 된 뒤 보도연맹활동을 하다 사형을 당했다. 밑에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올해 조카 손자가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종교는 있나.
“30년 넘게 성당에 다니고 있다. 신암성당에 다니다 지금은 상인성당에 다니고 있다. 영세명이 ‘이 비비안’이다. 미국 영화배우 비비안 리를 연상시키지 않나(웃음).”
-다시 젊은 날로 되돌아간다면. 다른 할 말이 있다면 해달라.
“군인이 되고 싶다. 훌륭한 장교가 돼 장한 이름을 남기고 싶다. 여자라서 훈련받는 게 힘들겠지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 싶다. 결혼은 안 할 거다. 떳떳하고 당당한 나라, 기죽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개인적으로 남한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살고 싶다. 한 스님이 ‘죽을 때 좋은 마음을 품고 있으면 얼굴이 환하다’고 하더라. 목숨이 붙어있는 한 반드시 강제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일본이 진정으로 사과하고 보상해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은 나라가 되길 바란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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