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찢고 붙이다, 그리운 유년 시절의…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계명대 미술학과와 동대학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일본 규슈산업대 대학원 미술연구과를 졸업했다. 1990년 대구 삼보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올해 맥향화랑까지 10여회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일본 오사카, 후쿠오카, 도쿄 등에서 여러차례 개인전을 개최했다. 한·일 현대미술교류전, 봉산문화회관 개관기념전, 대구·나가사키전 등의 단체전에도 다수 참여했다.
일본 북규슈시립미술관, 후쿠오카현립미술관에서 연 미술공모전 등에서 입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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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 앞마당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송광익 작가. 그의 작업실에서 보면 앞마당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자연풍경이 아름다운데, 송 작가는 여기에 매료돼 이 작업실에 둥지를 틀게 됐다고 말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송광익 작가는 2000년대 초반 작업에서 획기적인 변신을 꾀한다. 보통 서양화가들처럼 사실화, 구상화를 고집했던 그가 한지를 사용해 반입체적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캔버스에 붓질을 하던 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해 한지를 손으로 찢고 가위나 칼로 오린 후 이를 화면에 빼곡히 붙여나가는 기법을 작업에 도입했다. 화가들이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지만 이는 그림을 그린다는 큰 틀 안에서 내용이나 표현기법상에 변화를 주는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재료나 제작방법에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가 왜 이런 혁신적 변화를 꾀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한마디로 한지의 매력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손가락에 침 묻혀 창호지 구멍 뚫던…“행복한 기억 속으로 돌아가다”
한지는 닥나무껍질로 만든 우리의 전통종이를 가리킨다. 나무를 재료로 한 데다 손으로 직접 떠서 만들기 때문에 인공적이지 않다. 송 작가는 “나무가 주는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사람들이 직접 손으로 만들다보니 인간의 따뜻한 체온마저 느끼게 한다”고 한지의 장점을 설명한다.
“한지를 만지고 있으면 어느새 제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는 듯합니다. 어릴 때 밖을 보려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를 뚫었던 기억과 그 구멍을 통해 바라봤던 바깥의 정겨운 풍경들이 마치 어제 일인 양 스쳐 지나갑니다. 특히 배고플 때 창호지 구멍 사이로 어머니가 밥을 짓는 모습을 보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행복을 느끼게 하지요.”
그는 어릴 적 한지와 얽힌 추억이 유난히 많았다고 털어놓는다. “한지를 여러번 접은 후 여기에 문양을 그리고 이것을 가위로 오려 예쁜 문양의 종이를 만들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형, 동생과 누가 더 예쁜 모양을 만드는지 내기를 했던 기억도 나고요.”
그래서 지금도 한지만 보면 그는 정겨움이 솟아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이같은 한지가 가진 물성도 너무 좋다는 것이다. 그는 한지를 한마디로 ‘생명이 있는 종이’라고 특징지었다.
“한지는 숨을 쉽니다. 그래서 바람, 소리가 통하지요. 이것은 느낌이 통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소통이 되는 사물이란 의미지요. 한지는 보이는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보이는 이중적인 매력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서양종이가 가질 수 없는 한지만의 특징이지요.”
이같은 한지의 매력을 깨닫게 된 데는 현재의 작업실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86년 달성군 유가면의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집을 리모델링해 30년 가까이 작업실로 쓰고 있다. 컨테이너로 지은 집이었는데, 조용하고 집안에서 바라보는 마을 풍경이 좋아서 매입했다고 말했다. 컨테이너로 지어진 집에 자신이 직접 벽돌을 붙여 벽돌집처럼 만들었다는 작업실은 아담하고 소박하면서도 나름대로 독특함이 묻어났다.
“아내가 그 당시 달성군 현풍면에 약국을 개업해서 아내를 따라 가까운 이곳에 작업실을 얻었습니다. 당시는 회화작업을 했던 터라 굳이 시골로까지 나올 필요가 없었는데, 결국 아내를 따라 이곳으로 온 것이 제 새로운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
그의 작업실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무척 조용하다. 가끔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약하게 들릴 뿐이다. 그리고 작업실에서도 멀리 산이 보인다. 이런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그의 마음에 평화로움과 여유를 줬다. 시골로 들어오니 찾아오는 사람이 적고, 이곳저곳에서 자꾸 불러도 시골에 있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아서 좋다는 말도 털어놓는다.
“조용하고 만나는 사람이 적으니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다보니 작업할 시간적 여유는 물론 마음의 평정심도 자꾸 잃어버리는 것 같더군요. 이런 환경이 작가로서 살아가는 데 늘 극복해야 할 장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손으로 찢고 붙이고… “나의 작업엔 육체적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곳에서의 고독한 생활이 그에게 또다른 용기와 희망을 줬다. 지역 한 대학의 교수로 있던 그는 직장을 관둘 용기를 얻었다. 전원 속에서의 작업시간이 길어질수록 도심에서의 직장생활이 점점 그를 옭아매는 밧줄처럼 여겨졌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작업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이곳에 작업실을 옮긴 후 10여년 만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 후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이곳에서 살다시피 한다. “한번 들어오면 2∼3일씩 자고 갑니다. 대구의 집은 속옷 등을 갈아입으러 들르는 정도지요. 그렇다보니 이곳 생활이 오히려 집보다 편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작업실에는 웬만한 살림살이는 전부 갖춰져 있었다.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준 반찬을 가지고 와서 혼자 밥을 해서 먹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취재를 간 날도 작업실 중앙에 있는 탁자에는 라면과 과자봉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처럼 간단히 식사를 때우는 때도 많다. 시골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이 불편할 것 같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생활을 즐기는 것 같았다.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혼자서 작업할 때 그는 어린 시절의 소중하고 행복했던 기억, 젊은 시절 그를 설레게 했던 갖가지 추억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고 한다. 이 순간의 행복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면 할수록 자신이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어 좋다는 말도 덧붙인다. 유화에서 한지를 이용한 작품으로 작업과정이 바뀐 것이나 한지를 이용한 이 작업을 할 때도 가급적 인공적인 것들을 쓰지 않으려는 일련의 노력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한지를 수없이 오리고 붙여나가는, 큰 육체적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가위나 칼을 이용하면 한지를 자르기가 훨씬 쉽지만 그는 이를 최소한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직접 손으로 한다. 한지가 공장에서 기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런 한지 고유의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손으로 한지를 찢는 것이 좋다는 믿음 때문이다. 갖가지 모양으로 찢은 한지를 수없이 캔버스에 풀로 붙여야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풀도 밀가루풀을 가급적 이용한다. 한지가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약간의 본드풀을 사용하는 것도 어떤 부분에서는 못마땅하다.
“자연과 함께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연과 동화되게 됩니다. 표피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물의 내면을 보게 하는 힘을 갖게 해주지요. 이런 것이 화면 속에 그려진 그림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회화에서 한지의 물성을 바라보게 하는 작업으로 바뀌게 한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지요.”
그는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세상의 모든 일을 잊는다고 한다. 평화로운 이곳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세상 무엇이 더 부럽겠느냐는 말도 전한다. 허름한 작업실이지만 그에게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해맑고 아름다울까’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 송광익作 紙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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