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40718.010110742290001

영남일보TV

[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1] 스스로 목숨 끊어 일제에 저항한 만송 유병헌

2014-07-18

독립 향한 선비의 열망, 모진 고문에도 꺾이지 않았다네

20140718
칠곡 출신 독립운동가 만송 유병헌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숭의재’. 그의 옛 집터인 북삼읍 숭오리에 있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올해는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대구에서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칠곡군은 1895년(고종 32) 개청해 대구에 군청을 뒀고, 1914년 3월1일 왜관으로 군청 소재지를 옮겨왔다. 특히 군청 소재지를 옮긴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고장이 칠곡이었다. 6·25전쟁 당시에는 최후의 보루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승기를 잡은 호국의 성지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왜관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시리즈를 20회에 걸쳐 연재한다. 시리즈는 왜관으로 군청소재지를 옮긴 1914년부터 100년 동안 벌어졌던 칠곡의 주요 역사와 칠곡 출신 인물들을 다룬다.

시리즈 첫 회는 독립운동가 만송 유병헌(晩松 劉秉憲, 1842~1918)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병헌은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당시, 오적(五賊)을 성토하는 격문을 붙이며 일제에 저항한 인물로, 당시 일본에 세금을 낼 수 없다며 납세를 거부하기도 했다. 세 차례에 걸친 모진 투옥 끝에 1918년 옥중에서 단식, 순국했다.

 

 

#1. 금오산 기상을 타고나다

유병헌은 1842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서 유익원(劉翼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매관매직으로 부패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비판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가 태어난 숭오리는 남숭산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남숭산은 현재 금오산을 일컫는다. 금오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칠곡과 인동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그 생김새부터가 비범하다. 유병헌은 유달리 금오산을 사모했고, 실제 죽기직전 ‘이 산 기슭에 내 시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2. 글로써 항거를 시작하다, 첫번째 투옥

20140718
유병헌 시문집 만송집

격문 지어 저항…세계여론에도 호소
토지조사법 측량 거부 등 일제 통치 부정
세번의 감옥살이…결국 단식으로 순국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병헌은 통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여 조약의 무효화와 왜적격퇴에 대한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결국 1910년 8월, 경술국치에 이르게 되었고 이때 유병헌은 미련없이 죽고자 했다. 실제 당시 유병헌은 대궐을 향해 북망통곡(北望慟哭)하며 며칠간 곡기를 끊기도 했다. 하지만 죽는 것은 오히려 쉬운 길이었다. 살아 싸우는 것이 더 어렵고 치열한 법이었다.


이에 유병헌은 마음을 돌렸고 이때부터 그의 싸움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당시 68세의 노령이기에 칼을 들기는 어려웠지만 그에겐 ‘글’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매운 글’ 말이다.

유병헌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이른바 오적(五賊)과 칠흉(七凶), 그리고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역도를 성토하는 장문의 격문을 지어 대로변에 게시했다. 그리고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 일대 시골 선비들에게 서신을 보내 항거를 촉구했다.


‘한 나라에 해가 둘일 수 없다. 조선의 해는 고종황제뿐이다. 일왕(日王)은 인정할 수 없어니, 첫째, 망국의 한일합병을 혁파하라. 둘째, 경술국치를 투쟁으로 회복하라. 셋째, 국치오적을 주살하라. 넷째, 일왕의 모든 법령과 그 행위는 부정하라. 다섯째, 일왕이 내린 어떤 조세나 부역도 응하지 말라.’


뿐만 아니었다. 총독과 일본내각에도 병탄의 불의함을 적어 보냈다. 동시에 청(淸)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각국 공관에 장문을 보내어 세계여론에도 호소했다. 또한 1911년 친일 주구배(走狗輩)들이 사내총독의 송덕비를 충청도의 청산에 세우려 하자, 곧바로 청산향교에 엄중히 문책하는 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일본경찰은 ‘불온한 언론을 유포한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했고, 그해 12월 25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월형을 받았다. 첫 번째 투옥이었다.


#3. 납세를 거부하다, 두번째 투옥

갖은 위협과 징역형은 일제의 ‘가차없는 채찍’이었다. 동시에 일제는 ‘달콤한 당근’도 사용할 줄 알았다. 유병헌을 회유하기 위해 작위 수여와 은사금을 제안했다.

은사금(恩賜金)은 원래 ‘은혜롭게 베풀어 주는 돈’이란 뜻으로 주로 임금이나 상전이 아랫사람에게 내리곤 했지만, 일제의 은사금은 조선의 벼슬아치들에게 주는 재물을 의미했다. 작위가 조선인에게 주는 생색내기용 명예였다면, 은사금은 회유를 위한 일종의 뇌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유병헌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1911년 5월,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는 논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은혜와 원수를 변파함)’을 지어 일제를 규탄하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대저 은혜와 원수는 마치 백과 흑 같아서 변별할 필요 없이 일목요연한 것이다. 아! 섬나라 오랑캐가 세력을 얻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임금을 쫓아내고 우리 생민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저들은 도리어 재물로 우리 늙은이들을 유혹하여 은사금이라고 하니, 이 어찌 흑을 가리켜 백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간교한 꾀로 함정을 삼고 재물과 이익으로 미끼를 삼는데 불과하니, 조선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말 것이다.

진실로 흑과 백을 분별하는 사람이면 누가 즐겨 죽을 함정에 빠지겠느냐. 만약 이 함정에 빠지면 빠져나올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니 어찌 경계하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느냐. 돈을 받고 거주성명(居住姓名)과 도장을 준다면 끝내 일본의 노예가 되고 일본의 종자가 되어, 철권(鐵券)에 기재되어 무궁토록 전하여 그 자손들에게 미칠 것이니, 노예에서 다시 속죄할 수 없고 오랑캐의 종자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심장은 갈수록 혹독한 분통과 울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창자와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밥을 못 먹을 지경이다. 차라리 원수의 칼에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죽을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무릇 우리 조선인은 이를 보고 경계하고 삼가할 지어다.’


그해 10월에는 ‘일본에 세금을 낼 수 없다’며 납세를 거부했다. 이를 통해 일제의 모든 통치행위를 부정했다. 이 때문에 유병헌은 약목(若木)헌병대와 김천(金泉)헌병대, 김천경찰서 등에 불려나가 문초를 격기도 했다. 일제의 협박과 회유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럴수록 유병헌은 뜻을 굽히지 않고, 거세게 저항했다.

1912년에는 토지조사법에 의한 측량 자체를 거부하고 나섰다. 토지조사국에서 논과 밭에 꽂아둔 측량 푯말을 바로 다음날 모두 뽑아버렸다. 결국 12월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금고 5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두 번째 투옥이었다.


#4. 차라리 굶어 죽으리라, 세번째 투옥

20140718
유병헌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63년 세운 만송유선생순국기념비. 현재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에 세워져 있다.
출옥 후, 유병헌은 더 단단해졌다. 세금도 내지 말고 은사금도 결코 받지 말 것을 계속해서 역설했다. 급기야 1918년 3월, 약목헌병대와 칠곡군청에 일제 멸망을 예언하는 시구(詩句)를 보냈다. 일제는 그의 숨통을 다시 죄어왔다. 결국 또다시 체포되었고, 보안법 위반으로 벌금 20원과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세 번째 투옥이었다.

이때 그가 법정에서 큰 소리 치며 항변한 말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내가 일왕의 머리를 잘라, 그 두개골로 내 술잔을 만들지 못한 것이 한이다.”

어두운 감옥에서도 그의 항거는 멈추지 않았다.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다 감옥에 갇혔으니 동지 여러분 ‘조선독립만세’라도 크게 부릅시다.”

철창 사이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당당하고 단호했다.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매일 철창을 뚫고 복도에 울렸다. 이 때문에 고문을 수시로 당해야 했다. 일제는 유병헌의 코에 고춧가루물을 붓고 손톱을 빼는 등 모진 고통을 가했다. 하지만 유병헌의 결기는 완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홍열을 불렀다. 어려운 면회였다. 맑은 눈으로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락이 누렇게 익었더냐?”

처참하게 상한 아비를 앞에 두고 아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보름 후에 와서 나를 거두어 가거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유병헌은 곡기를 끊고 죽기를 작정했다. 꼿꼿한 단식 끝에 그는 결국 순국했다. 향년 77세였다.

손부(孫婦) 신성희(申性喜) 여사의 전언에 따르면, 대구감옥에서 생가인 북삼까지 100여리를 운구하는데, 삼남의 유림과 선비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애도하였고, 일경들이 민란을 염려할 정도로 마을의 너른 들판에 조문객이 구름처럼 하얗게 모여들었다고 한다.

1963년 독립유공 대통령표창, 77년 건국포장, 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현재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옛 집터에 후손들이 세운 재실 ‘숭의재’가 있다. 만송유선생순국기념비(晩松劉先生殉國紀念碑)는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에 세워져 있다.

글=김진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 : 칠곡군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