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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4> 2·28 대구 민주운동

2015-03-19

“학도여, 일어서라” 자유당 독재에 항거한 대구發 함성

20150319
영남일보가 2·28 1주년을 맞아 1961년 2월 21일부터 27일까지 7회에 걸쳐 연재한 ‘혁명풍’.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대구 고교생 시위로 시작된 학생혁명의 의미를 되새겼다.


20150319
대구 중앙로에 학생들이 몰려나와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하고 있다. 2·28 민주운동은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자생적 시위였고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시작되었다.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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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28 당시 시위학생 데모대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28일 낮 12시55분 경북고등학교 교정에서 울려 퍼진 우렁찬 외침은 광복 후 새로운 국가 형성기에 터져 나온 순수한 학생들의 피맺힌 절규이자 정의수호를 갈망하는 청춘의 출정가였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12시 55분
경북고등학교 교정에서의 외침은
자유당의 부정·불법선거에 저항
정의 갈망하는 청춘의 출정가였다

일요일에 예정된 장면 박사 유세에
학생들 참석 막기 위해 등교 지시하자
대구지역 8개고등학교 학생들은
불의에 맞서 집단행동에 나섰고…

영남일보는 ‘혁명풍’ 연재물을 통해
당시 정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자유당의 실정과 민심이반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만 하더라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이는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투사일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멋쟁이 지도자를 향한 신뢰와 존경의 표시였다.

하지만 국민의 호의적 평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6·25전쟁 중에 중대한 실책을 거듭하면서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 내몰고, 시간이 지날수록 위법·탈법적으로 권력기반을 굳히는 데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1958년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속한 자유당 후보자들은 총투표수의 절반을 조금 넘게 득표해 민주당과 표차가 얼마 안 났다. 이미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 길을 열어준 자유당 지도부는 60년 3월15일 치러질 정·부통령선거에서 법대로 해서는 도저히 승리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러한 민심이반에 따른 불안감 속에서 부정선거가 준비되었다.

◆노골적인 부정선거 조장

자유당이 정·부통령 선거 대비과정에서 국민을 크게 실망시킨 사례 가운데 하나가 대공사찰 강화와 언론 통제로 공안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보안법 파동이었다. 1958년 8월 여당인 자유당이 국회에 상정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에는 이적행위 개념 확대, 선전·선동행위 처벌 규정 신설, 군인 및 공무원의 선동행위 처벌규정 신설, 헌법상 기관의 명예훼손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 신설, 사법경찰관 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및 구속기간 연장, 군 정보기관의 간첩 수사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 등 초강경 내용이 담겼다.

야당은 이 법이 야당 탄압에 이용될 것을 우려해 강력히 반대했으며 원내와 원외를 번갈아가면서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을 벌였다. 자유당은 무술경관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에서 밤샘 농성하는 야당 의원들을 내쫓고 법안을 통과시켰다.

59년 3월 자유당 정부는 선거관리를 책임질 내무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했다. 최인규는 취임사를 통해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고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 후보들이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는 탈법 조장 발언을 해댔다. 59년 6월29일 자유당은 전당대회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을 제4대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부정선거 준비를 본격화한 내무부는 4할 사전투표, 3인조와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계획을 세웠다. 야당인 민주당은 당내 신·구파 간 갈등과 자유당의 분열책동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조병옥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았다.

그러나 60년 2월15일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갔던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대통령 선거전은 이승만 자유당 후보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우려한 바와 달리 너무나 쉽게 재집권에 성공하자 자유당의 관심사는 온통 부통령 선거에 집중됐다. 여든을 넘긴 고령의 지도자가 임기 도중에 사망하거나 직무수행을 못할 가능성이 상당한 만큼 대통령 유고시 계승권을 가진 부통령 자리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앉혀야 했다. 자유당의 부정과 불법은 한층 더 극심해졌다.

◆민주당 대구 유세와 일요등교 지시

말도 안 되는 탈법선거 행태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은 대구지역 고등학생이었다. 어린 학생들을 집단행동으로 내몬 계기는 일요일 등교지시였다.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는 오후 2시부터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강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시절의 대구는 56년 야당 후보를 부통령으로 뽑는 데 앞장설 정도로 기세가 대단한 야당 도시였다. 자유당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그런 대구의 야당 편향 정서를 억누르기 위해 물불을 안 가렸다.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10일 대구시내 각 기관장과 학교장을 소집해 협조지시를 내렸다. 요지는 2월28일(일요일) 야당 강연회 당일에 동회와 직장마다 각종 행사를 열어 사람들이 행사장을 찾지 못하게 막을 것, 고등학생들을 등교시켜 야당 강연회에 나갈 수 없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각급 학교에서는 학기말시험이나 토끼사냥 같은 핑계를 대면서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를 강요했다. 사리를 벗어난 자유당의 부정선거운동에 분노한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시위하기로 뜻을 모으고 2월28일 오후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경북고, 대구고, 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8개 고등학교의 1·2학년생이 주도했다. 학생들은 중앙통을 향해 행진하면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원에 자유를 달라!’ ‘학교를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 인류애를 달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불의와 부정에 항거한 고등학생들의 거리 질주는 이틀 동안 대구 중심가에서 이어졌다.

◆혁명의 불길 점화

교문을 박차고 나가 정권의 무능과 독재에 맞선 대구시내 고등학생 시위는 전국적으로 침묵하던 대중을 일깨워 혁명적 에너지를 분출시키고 거대한 사회변혁을 이끌어냈다. 당시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이던 대다수 학생과 지식인은 행동 표출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대구의 고교생들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뉴스 보도를 듣고 깜짝 놀랐다.

대구에서 타오른 저항의 불길은 곧 대전과 부산의 고교생이 교문을 박차고 담을 뛰어넘어 길거리를 달리게 했으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지고, 고려대와 서울대 등 서울지역 대학생 시위로 번지게 된다. 1960년 4월19일 오전에는 3만여 명의 학생이 광화문과 서울시청 사이에 운집했다. 경찰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오후에는 10만여 명의 군중이 서울 도심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4월26일, 구름 군중이 이른 아침부터 서울 중심가로 몰려나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오전 11시경,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했다. 대구 2·28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저항과 도전이 부정하고 부패한 정권을 쓰러뜨린 것이다.

2·28 시위의 열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3월1일, 영남일보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라고 있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우리의 젊은 세대가 옳다고 믿는 바를 할 때는 아무도 두려워 할 줄 모른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가. 이것은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를 향해서 전진하고 있고, 우리의 교육은 보다 높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증좌이다”라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다음날 사설에서는 혁명의 도화선으로까지 점점 확산되어 가는 2·28 학생시위 배경을 검토하고 학원의 자유와 자치 문제를 지적하였다. “이번 고교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우리가 재삼 고려하고 시정해야 할 게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원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 문제이다. 학원은 참과 바름과 옳음을 탐구하는 상아탑이다. 학원은 진리의 광맥을 더듬어 캐어내는 학문과 문화의 도량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원의 권위는 존중되고 학원의 자유와 자치는 보호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61년 2월28일, 영남일보는 ‘2·28 1주년에 부친다’는 사설을 통해 대구 고교생 시위로 시작된 학생혁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8·15 못지않은 혁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하면서 ‘기성세대의 각성을 촉구’했다. 21일부터 27일까지는 ‘혁명풍’이라는 7회에 걸친 연재물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다. “젊은 그들에게는 경험이 없었고, 감당할 조직의 뒷받침이 없었다. 고귀한 대가를 치른 혁명은 그것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민주적인 혁명세력에 바통을 넘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역사는 발전하고 있었다. “흥망의 앞날이 크게 염려되는 조국은 사심 없는 순수한 청년학도들의 비장한 결심과 영웅적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사설은 끝을 맺었다.

이제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아쉬운 게 있다면 2·28 정신이 지역에서 제대로 전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2·28 민주운동은 대구·경북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거사였다. 1960년 2월에 순결한 청춘이 온 몸으로 구현해낸 그 정신의 고갱이가 세월을 거듭하면서 청년세대에 전해질 때 2·28은 완성된다.

글=오창균<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자료조사=조사팀 박성희·

이경봉 학생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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