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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10> ‘새마을 세계화’ 테러·전쟁·기아·부패 해결에 기여 기대”

2015-06-11
201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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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22일 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재민 복구 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해 근면·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 일명 새마을가꾸기운동을 시작했다. <영남일보 DB>


지표에 의한 관료행정적 평가나
독재라는 정치적 목적 평가 탈피
정신가치·민속문화적 접근 필요

당시 동참했던 사람들 대상으로
스토리텔링 소재 기록에 노력을

佛대혁명 자유·평등·박애정신이
전세계 민주화에 공헌한 것처럼
새마을 근면·자조·협동 정신은
신자유주의의 병폐 해소에 적격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 현실은 후진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도 1인당 국민소득은 242달러 정도로 체제경쟁 집단인 북한보다도 낮은 수준이었다. 전기가 없어 호롱불로 책을 보아야 했고, 비포장도로 위로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먼지를 헤치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식수를 마련하기 위해 공동우물을 이용하는 마을이 많았으며, 당시 농촌주택의 80%가 초가집이라는 수치가 말해주듯이, 욕조 딸린 화장실이나 수세식 변기가 없는 등 비위생적인 주거환경을 감수하며 살았다. 전기밥솥,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전화 등 이른바 ‘문명의 이기(利器)’는 산 넘고 바다 건너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소달구지와 지게 대신에 리어카와 자전거, 스피커 대신에 라디오만 있어도 문화생활을 하는 잘 사는 집으로 손꼽혔다. 한 마디로, 대다수 우리 국민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보장되지 않은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바로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잘살기 운동’이었다. 1971년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와 점화지가 바로 우리 지역 경북도(대구시가 별도의 지자체로 분리되기 이전)라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은 양분된 것이 우리 사회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농촌마을의 환경개선과 소득증대에 주목하고 있다. 지붕 개량사업, 농로 정리사업, 소교량 가설사업, 소하천 정비사업, 간이 급수시설 사업, 전기통신 가설사업 등 흔히 가시적이고 측정 가능한 지표에 의존한 관료행정적인 평가는 경이로운 실적을 내세운다.

반면에 새마을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관주도의 국민동원방식에 근거하고, 특히 유신체제 공고화를 통한 장기독재라는 정치목적과 연계한 평가를 선호한다.

전자는 여권 보수 세력에서, 후자는 재야 진보 진영에서 단골메뉴처럼 주문하는 새마을운동에 관한 담론이다. 양자의 인식 모두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진부하고 식상한 평가라고 지적하고 싶다. 정치적 주장이나 경제적 논리에 치중하여 칭송 아니면 혐오라는 양극단을 오가는 것을 잠시 접어두어도 좋을 시점에 이르렀다.

새마을운동은 하나의 역사적 실체이자 사회적 사실이다. 2008년 3월5일 한 조간신문이 실시한 한국갤럽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지난 60년 동안 우리 민족이 성취한 업적에서 새마을운동이 1위를 차지했다. 이제는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학술적인 담론이 형성되어 그 정신가치적 내지는 민속문화적 측면에 접근하는 것이 일반 민중을 중심에 두는 평가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바람직한 일은 엘리트층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새마을운동을 수단과 발판으로 이용하는 형태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생존하는 새마을운동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기록해두는 노력이 시급한 때이다.

돌이켜 보면 새마을운동이 우리의 외형적인 문화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의 주거양식이나 자연경관을 손괴한 점은 안타까운 측면이다. 또한 내면적인 무형문화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의례와 생활양식을 망실한 부분도 유감스러운 면을 지닌다.

하지만 불편한 시설과 비효율적인 낭비를 해소하고 허례허식을 간소화하기 위해서 취해진 불가피한 변화의 부산물이라고 변호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느 한 문중 마을의 경우이지만, 새마을운동 시기에 잘 보존되었던 재실 비품들이 나중에 도시화의 영향으로 지킬 사람이 없게 되자 돈에 눈먼 장사치들에 의해 훼손된 점만 보더라도 하나하나 따져봐야 제대로 평가 가능한 사안이다.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가늠할 때,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하면 된다’는 정신적·의식적 개혁이다. 여기에다가 새마을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마을 구성원들이 의사소통과정에 참여하고, 특히 여성들한테도 집 바깥일이라는 공적 영역에 자기주장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됨으로써,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실천을 경험하게 된 점은 높게 평가해야 마땅하다. 민초들의 주체의식 형성과 공공문제 해결에 대한 자신감 부여는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터이다.

‘잘 산다’는 의미는 시대에 따라 사회적 의미가 변해왔다. 최근 들어 생존욕구의 충족을 넘어서서, ‘웰빙’이라는 표현처럼 정신적 안정과 문화적 욕구의 만족까지 그 의미는 확장되었다. 마찬가지로 새마을운동 역시 진화해온 실체이다. 고유명사로서의 새마을운동은 과거 70년대의 것이다. 이제 보통명사로서의 새마을운동이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고 있다.

근대 이래로 프랑스 시민대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전 세계의 민주화에 공헌해온 것처럼 새마을운동의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지구촌의 보편적 윤리로 한 자리 차지할 만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이기주의와 물신주의를 극복하고, 사회 양극화에 의한 억압과 지배를 견제하며,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소외를 타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환경위기와 재난재해를 사전에 방지할 것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테러, 전쟁, 기아, 부패 등 현대사회의 병폐와 부조리를 척결하는 데 새마을운동의 세계화가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규원<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자료조사=조사팀 박성희·강미주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20150611

아궁이 개량 시멘트 보내기 등 ‘달구벌새물결운동’ 범도민적 추진


■ 영남일보에 비친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 그 실제와 앞날’ 주제로
72년 3월25일자 좌담회 기사 게재
71년 3월13일자 ‘푸른고장’ 社告
녹화운동에 4천계좌 22만주 달성

낙후된 농촌 근대화의 목표를 지녔던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22일, 박 정희 대통령이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농촌자조노력의 진작을 위해 내린 연구 지시가 그 시초가 됐다.

영남일보도 이와 관련된 소식을 구체적으로 전했는데,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1970년 5월12일자 영남일보 4면에는 ‘쌀값 정찰제 실시’라는 제목 아래 대구 등 3대 도시에서 한 가마에 5천700원으로 정찰제를 실시해 단속을 벌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 5월14일자 영남일보 4면에는 ‘수출 목표 25% 달성’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경북도가 연말까지 농산물 등 1억1천500만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새마을운동 초기 목표였던 ‘농가 소득 배가’라는 당시 분위기가 잘 반영된 생생한 기사였다.

같은 날 7면에는 ‘기초시정 소홀에 불만’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이러한 사실이 ‘시장에게 편지보내기 운동에서 밝혀져’라는 부제목이 달린 기사로 실렸다. 기사의 요지는 ‘살기좋은 도시’라는 대구시의 슬로건과 달리 청소, 하수도 등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당국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는 새마을운동이 농촌(지붕과 주택 개량, 마을도로 확충·전기화사업 등) 새마을운동과 도시(도시환경 개선, 법질서 준수, 낙후지역개발 등) 새마을운동으로 크게 범주화된 점을 고려할 때 도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단초를 제시한 의미있는 기사였다.

72년 3월25일자 4면에서는 교수, 새마을 지도자, 경북도부지사 등 관련 전문가를 초청해 ‘전국에 불붙은 새마을운동 그 실제와 앞날’이라는 주제로 열린 좌담회 기사도 실었다.

영남일보 차원에서 새마을 돕기 운동도 꾸준히 펼쳤다. 협동 새마을사업에 성금 보내기, 아궁이 개량 시멘트 보내기, 도시새마을 건설 시멘트 보내기, 고령군 쌍림면 신곡교 가설성금 모금, 진량면 평사동 시범마을 시멘트 보내기, 낙후마을돕기, 심천종합 운동장 건설에 시멘트 보내기 등 당시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주도로 활발히 전개된 새마을운동에 적극적인 협력을 했다.

71년 3월13일자 1면 ‘보다 푸른 고장을’이란 제목의 사고를 통해 대대적인 헌수녹화운동도 전개했다. 이듬해 2월25일엔 통일동산 조성과 새마을 녹화를 위해 광범위한 헌수녹화운동을 펼칠 것을 천명하고, 도민의 적극적인 협력도 요청했다. 1계좌를 1천원씩으로 한 이 운동을 통해 4천계좌 22만주의 나무가 접수되는 성과를 거뒀다. 헌수녹화운동은 이후 79년까지 매년 이어졌고, ‘푸른 경북을 만들자’는 슬로건으로 경주, 김천, 문경, 점촌 등 각 지역단위에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을 알차게 가다듬는 새물결운동을 범도민적으로 추진할 것을 다짐하는 ‘달구벌새물결운동’도 벌였다. 새로운 사회풍조의 확립으로 향토 경북의 전통과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78년 9월7일 2천여명의 각계 대표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달구벌새물결운동 범도민대회에서는 ‘500만 도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자’, ‘경상도인의 긍지를 되살려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자’는 외침이 울려퍼졌다.

달구벌새물결운동본부 발족 이후 한 달 만에 각 시·군 지부조직이 완료됐고, 잇따라 시·군민대회가 개최돼 8만3천여명이 행사에 참여하는 성과를 거뒀다. 영남일보는 이 운동을 계기로 한 ‘윤리회복…더 밝은 내일을’이라는 제하의 실천운동을 10월11일부터 항목별로 15회에 걸쳐 시리즈로 엮어 보도했다.

신인철기자 runc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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