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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② “주위서 말렸지만 아내가 용기줘 연변行 결심…이장수 감독 조언도 받았다”

2015-11-27

■ ‘연변의 히딩크’ 박태하 감독을 만나다

20151127
박태하 감독이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20151127
박태하 연변FC 감독이 지난 22일 포항을 찾은 가운데, 포항시청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친구에게 도와달란 부탁 받고 고민
경기 영상 보고 가능성 있다 판단

대부분 동포 선수…소통 지장 없어

어릴때 부모 함께 산 선수 20% 안돼
선수들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
지시와 명령보다 이야기 먼저 들었다
강압적 훈련 대신 스스로 하게 유도
조직에 대한 희생과 헌신 강조

경기력 끌어내려면 환경이 좋아야
원정 경기 때는 구단에
음식·잠자리 좋은 5성급 호텔 요구



백두산에 호랑이가 살까. 백두산의 중국식 이름인 창바이산(장백산) 인근에 사는 주민이 가끔 호환(虎患)을 당한 뉴스가 보도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안에 장백산이 있기에 연변축구팀의 애칭은 ‘장백호랑이(창바이 라오후)’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유일한 소수민족 축구팀인 연변장백호랑이팀은 1955년 창단했다. 박만복 감독의 지휘로 65년 중국 갑급연맹전(당시 1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해 전 중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때부터 축구는 연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기스포츠가 됐다. 연변팀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94년 삼성전자가 후원을 하면서 팀명이 ‘길림삼성’으로 됐다 95년 현대자동차가 스폰서를 하면서 ‘연변현대’로 바뀌기도 했다. 97년 연변팀은 옛 발해의 첫 수도였던 ‘오동(敖東·돈화)’을 빌려 ‘연변오동’으로 팀명을 변경하고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 출신 최은택 감독을 영입해 중국 갑A 리그(1부)에서 4위를 했다. 하지만 ‘최 교수님’으로 불리던 최 감독은 98년 시즌 중간에 연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99년 시즌엔 연변오동 대신 ‘길림오동’으로 팀명을 바꿔 갑A에 참가하고 중국FA컵에서 4강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2000년 12월 을 리그(2부)로 떨어지면서 팀은 저장성 뤼청에 매각되는 수모를 겪었다. 2004년 최은택 감독의 제자인 조선족 동포 고훈 감독이 지휘봉을 맡으면서 다시 갑급 리그로 승격했다.

축구는 ‘또 다른 민족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란 말이 있듯 연변동포의 축구사랑은 민족사랑과 맥을 같이한다. 이는 연변축구팬협회의 구호가 ‘조선민족의 발전과 연변축구의 발전’이란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연변 조선족 동포에게 있어 축구란 일상의 작은 희망이자 조선족의 자존심이다. 모국을 떠나 이역만리 만주 땅에 정착해 한족으로부터 설움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축구만은 한족보다 잘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 22일 오후 포항에 있는 한 카페에서 박태하 연변FC 감독을 만났다. 박 감독은 시즌이 끝난 후 포항과 서울을 오고가다 홍콩으로 출장을 간 뒤 다시 포항으로 내려왔다. 포항엔 그의 아내와 둘째가, 강구엔 모친이 살고 있다. 내년에 꿈의 슈퍼리그에 진입하면서 빠듯한 일정 속에 인터뷰 시간을 냈다. 박 감독은 영남일보 애독자에게 직접 사인을 해주었다. 박 감독은 178㎝의 훤칠한 키에 미남형이다. 그가 말할 때 이따금 포항방언에 연변 억양이 튀어나와 정감이 갔다.


▶먼저 축하한다. 연변에서 기적과 같은 축구 역사를 만들어냈다. 가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고맙다. 지난해 말 중국 상하이에서 한 기업체의 부사장으로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영덕 강구에서 축구를 같이 하던 친구인데 ‘연변 축구팀을 맡아볼 의향이 없느냐’는 부탁을 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연변축구팀에 대한 말을 꺼내더라. 2부리그 성적이 꼴찌여서 3부로 떨어지게 됐는데 어렵겠지만 잠시 와서 도와줄 수 없느냐고 했다. 3~4일 고민하다 일단 가서 상황을 살펴보자고 생각하고 12월1일에 연길에 갔다.”


▶가보니 어떻던가.

“낙후됐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않더라. 연길시가 한국의 어느 도시보다 활기찼고 동포들도 순수하고 정이 많았다. 감독을 맡기에 앞서 구단에 지난해 시즌 경기 영상을 보고싶다고 요구했다. 사흘간 집중적으로 영상을 분석했다. 영상을 보고나서 쉽지는 않겠지만 선수들이 경쟁력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열흘 안에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사흘 만에 팀을 맡겠다고 했다.”


▶중국 프로축구계 감독 자리는 ‘외국인 감독의 무덤’이라 불린다. 연패를 하면 시즌 중에도 경질된다. 연변오동팀 최은택 전 감독은 물론 ‘충칭의 별’로 불리던 이장수 감독도 끝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박 감독은 감독으로선 첫 무대가 아닌가.

“그렇다. 주위에서 다들 말렸다. 나도 처음엔 망설였다. 무모한 도전이 아닌가 걱정도 됐다. 그런데 아내가 용기를 줬다. 감독을 맡기 전에 이장수 감독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힘들게 결정했으니 주변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의지대로 해라. 한 번 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밀고 가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 마음을 굳게 다잡고 12월10일 연길에 다시 들어가 오전에 계약을 하고 오후부터 훈련을 개시했다.”


▶팀 상황은 어떻던가.

“2013년 7월 포항제철 아톰스 출신 조긍연 감독이 경질되고 난 뒤 조선족 동포출신 감독 3명이 번갈아가면서 팀을 맡았지만 지난해 성적이 최하위로 추락해 을급(3부) 리그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선수들은 성적 저하로 급여를 제때 못 받아 오합지졸이 됐고 구단에선 이기려는 의욕이 없다며 임금을 체불했다. 그래서 선수나 구단 모두 ‘멘탈’이 붕괴됐더라. 경기장을 찾는 관중도 평균 2천~3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기술을 갖고 있었다. 30명 가까운 선수 가운데 외국 국적 3명을 제외하고 20여명이 조선족 선수다. 또 주전 11명 중 용병과 1~2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조선족 동포인데 열정과 근성이 있고 민첩성이 뛰어났다. 체구는 작아도 잠재력을 보았다.”


▶시즌 시작 전 연변FC가 을급으로 강등되지 않고 갑급에 잔류한 이유는 무엇인가.

“운이 좋았다. 갑급 리그 16개팀 중 최하위 2팀이 을급으로 가게 되는데 14위팀이 해체되고 15위팀이 선수단 급여미지급 사태로 자동 을급으로 강등돼 우리가 갑급에 남게 됐다. 그 소식을 올해 1월31일에 통보받았다. 보통 갑급 리그 시즌경기는 3월 초에, 을급은 4월 중순에 시작하는데 개막전을 한달 열흘 앞둔 상태였다.”


▶선수들의 미지급 급여는 어떻게 해결했나. 조선족 동포 선수들의 경제적·가정적 환경이 그리 좋을 순 없을 텐데. 한국에선 프로선수가 임금을 못 받는 상황이 없지 않나.

“중국 프로축구 갑급과 을급 리그에선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한다고 해 나도 놀랐다. 2015시즌 시작 전에 하이난에서 1개월, 쿤밍에서 50일, 한국 거제도에서 20일 전지훈련을 가게 돼 있었는데 그 전에 해결했다. 연변FC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속 축구팀이다. 주 체육국 국장이 사장인데 임종현이란 분이다. 그가 단장을 지명하는데 박성웅씨가 신임 단장이 됐다. 단장에게 찾아가 여건이 된다면 밀린 급여를 해결해 달라고 했다. 선수와 감독이 경기와 훈련에 전념해야 하는데 운동을 하면서 체불임금과 수당에 신경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인생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데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선수들에겐 내가 책임지고 빨리 해결할 테니 운동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구단이 나흘 만에 그 문제를 해결해 줬다.”


▶30명 가까이 되는 선수를 이끌려면 힘이 들겠다. 선수들과 소통문제는 어떻게 극복했나.

“감독과 선수가 같은 언어를 쓴다는 건 큰 장점이다. 동포 선수가 대부분이라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다. 한족은 통역을 쓴다. 선수를 파악하려고 자라온 환경을 조사해보다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 같이 지낸 친구가 20%가 안 됐다. 부모가 한국과 일본, 중국 대도시 등지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갔기 때문에 대부분 혼자 자랐다. 그나마 조부모가 있는 경우는 다행이었다. 한족도 마찬가지다. 선수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시와 명령보다 선수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었다. 볼을 못 찬다고 탓하고 책망하기 전에 ‘이렇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강압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대신 스스로 잘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대부분 혼자 자랐기 때문에 조직에 대한 배려, 참을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조직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강조했다. 힘들면 정신상태가 해이해지는데 승부는 간절함에서 결정된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가 있으면 이미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수들이 패배의식에 젖어있었다. 그걸 깨뜨려야 했다. 선수들이 나보다 부족한 건 축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다. 다른 건 내가 그들보다 나은 건 별로 없다. 내가 먼저 낮아져 선수에게 다가갔다. 그건 코치를 하면서 여러 감독을 만나 터득한 거다. 하지만 그분들의 방식과 나의 지휘방식은 같지 않다.”


▶효과가 있었는가.

“스포츠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했더니 조금씩 신뢰와 존중이 싹트더라.”


▶중국은 땅이 넓어 원정을 가면 2~3일이 걸릴 때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숙소, 음식과 같은 지원환경은 어떠했나.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마음이 편해야 잘 할 수 있다. 선수들의 기량과 경기력을 완벽하게 끌어내려면 환경이 좋아야 한다. 구단 예산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 조건에서 가장 좋은 호텔을 잡아달라고 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엔 빈관은 물론 3~4성급 호텔에서 잤다고 했으나 나는 5성급호텔을 요구했다. 호텔이 좋으면 음식이 잘 나오기 마련이다. 사실 훈련보다 더 중요한 건 휴식이다. 잘 먹고 잘 쉬어야 경기력이 향상된다. 원정을 가서 경기 전 숙소를 옮긴 적도 있다. 중국 프로축구에서 원정경기의 승률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홈보다 어웨이경기가 힘들다. 특히 연변은 추운 날씨 탓에 3월 초 시즌 개막 후 5라운드 연속 원정경기를 하도록 돼 있었는데 구단에 요청해 원정경기를 3라운드로 줄일 수 있었다. 우리 구단의 1년 예산은 100억원 정도다. 하지만 다른 구단은 우리보다 5~10배 높다고 보면 된다. 연변 주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하고 선전의 보험회사인 부덕보험이 우리팀 주요 스폰서다.” ☞ 3면에 계속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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