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0주년 맞은 대구
배 졸이면서도 낭만성 구사
피란처로 온 문인들의 삶과
공권력에 무참하게 학살된
민간인들의 상처가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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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대구문학관장 |
-낭만성?
전봉건은 부산을 떠나 대구로 왔다. 막막했다. 월남 후 서울에 정착했지만,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형 봉래가 전쟁으로 피란을 간 부산의 다방에서 다량의 신경안정제를 먹고 자살한 충격이 컸다. 문단에 갓 등단한 신진시인으로 대구로 왔지만, 전쟁 상황으로 어수선한 낯선 도시에서 깃들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음악다방 르네상스를 찾았다. 거기서 DJ를 맡으면서, 기식을 했다. 자주 김종삼이 와서 드뷔시의 음악을 청했다.
이런 기억이 50년대 초반 대구 피란시절의 갈피 속에 깃들어 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데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이었는데도 이 기억은 희미하나마 애틋한 빛으로 일렁이는 느낌이다. 문화예술인들의 행적이라서 그럴까? 심지어는 먹을 것이 없어 어린애 베개를 뜯어내어 그 속의 좁쌀을 꺼내 죽을 끓여 먹고 연명하기도 한 박두진의 궁핍을 떠올릴 때마저 아련한 낭만성에 휩싸이기도 한다.
대구는 그런 기억을 갖는다. 전쟁으로 전국 문인들의 피란처가 되면서 잠깐 동안이나마 한국 문단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데 따른 기억이다. 전국의 예술인들이 북적댔다. 구상, 마해송, 조지훈, 유치환, 박두진, 박목월, 오상순, 서정주, 유주현, 양주동, 전숙희, 황순원, 최정희, 정비석, 김종삼, 전봉건, 이육사 등이 지역의 이호우, 이영도, 이효상, 박훈산, 신동집, 김성도, 서정희, 허만하 등과 어울렸다. 화가 이중섭, 작곡가 권태호 등 예술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대구의 중심가였던 향촌동을 거점으로 하여 기행과 치열한 예술 활동을 병행하면서 전쟁 중의 우리 문학의 공백을 메워나갔다.
대구문학관은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하여 대구가 겪었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궁핍으로 배를 졸이면서도 짐짓 특유의 낭만성을 구가했던 그 시절을 새롭게 들추어내면서, 관련 자료들을 돌아보고, 그러한 경험이 대구 문학을 어떻게 거듭나게 했는지를 조명하는 전시가 될 것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들
기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은 대구인들에겐 더 특별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의 현장들이 곳곳에 있다. 경산시 평산동의 코발트광산, 대구 가창골을 비롯한 인근의 산골짜기들. 한국전쟁 전후에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 등 민간인 수천 명이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한 곳들이다. 이 기억들은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다가도 시나브로 아프게 전신을 뚫고 나온다.
희생자들의 유족회는 처형의 기억을 더듬어 시신을 발굴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원을 풀어줄 자리를 찾아왔지만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시신 발굴이 본격화되려는 즈음에 갑자기 중단되거나, 찾은 일부 시신들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다시 흩어져버리는 기막힌 일들이 있어 왔다. 유족회는 이들을 기억하는 자리를 만들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당국과 지자체의 미지근한 대응으로 원활하지 못한 형편이다.
2016년 대구시의회가 '대구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통과시킨 데다, 지난 5월20일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가결, 과거의 미흡했던 조사에 대한 진실 규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에 그나마 기대를 건다. 제주 4·3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에서 보듯 그 아픈 기억이 대구에서도 뚜렷이 부각되어져야 한다. 아무튼 유족회는 해마다 치른 대로 곧 가창댐에 모여 학살의 현장을 수장한 시퍼런 물을 보며, 아픈 기억 속의 아버지를 목메어 부를 것이다.
시인·대구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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