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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문학이 갖고 있는 풍성한 잔치상을 70년 전 대구가 마련"

2020-06-24 21:50

대구문학관 이하석 관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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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학관 이하석 관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70년 전 대구 향촌동에 꽃피운 문화예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현대 한국문학이 갖고 있는 풍성한 잔치상을 70년 전 대구가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학을 비롯해 우리나라 예술 발전에 있어 그 시절 '대구의 예술'이 중요한 발판이 됐습니다."

이하석 대구문학관 관장은 6·25 당시 문화예술의 수도였던 대구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구문학관은 한국전쟁 70주년 기획전시 '피란문단, 향촌동 꽃피우다'를 지난 23일부터 진행하고 있다.

이 관장은 지난해 향촌동을 주제로 시집을 펴냈을 정도로 평소 과거와 현재의 향촌동에 많은 애정을 드러내왔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고 한반도가 초토화되다시피 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막다른 심정으로 서울보다 남쪽인 대구나 부산 쪽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문학의 경우, 서울 쪽 문단과 대구 문단이 모두 대구에 한데 모이게 되는 독특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때 대구에 피난 온 예술가들은 향촌동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요즘 말로는 카페 같은 공간들이 향촌동에 모여있었고, 대구역도 가까이 있다보니 향촌동이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전쟁통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 특히 문학인들이 대구라는 도시를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에 전쟁 상황 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대구에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첫번째 이유일테고, 피란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대구가 예술가들의 상징적 공간이 된 이유도 있을 겁니다. 또 대구라는 도시와 주변의 경북 안동, 경주, 성주 등의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적 풍토가 문인들의 정서와 잘 맞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시 '서울 예술'과 '대구 예술'의 만남은 어땠을까. 이 관장은 "전쟁기에는 타지에서 왔다고 따돌리거나 배척하는 것 없이 서로를 수용했다. 그 당시엔 예술가들이 다방이나 술집에서 격의없이 어울렸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지역 예술가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강한 자극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구 쪽 문인들도 서울의 유명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서로 경쟁도 하고 문학의 폭을 넓혔을 겁니다. 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구의 문화예술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화려하게 꽃 피운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1950년대 향촌동은 대구와 우리 예술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1950년부터 53년까지 3년간의 기간 동안, 대구 향촌동이라는 공간적 특성과 피란기 예술이 만나면서 이색적인 문화예술이 꽃피었습니다. 대구는 짧은 기간이나마 한국 문단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그 시기는 여러 의미에서 중요한 한 때로 오래 기억될 겁니다."
글·사진=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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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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