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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2부-대구의 문화예술] (1)대구, 문화예술의 수도가 되다

2020-06-24 21:30

구상부터 이중섭까지...전쟁통 피란 온 예술인들 품은 대구 향촌동은 '문화의 수도'

문학관
1951년 대구 향촌동 모나미 다방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문인들. 구상과 조지훈, 오상순 등 문인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전쟁기 예술가들은 대구 향촌동에 모여 예술을 이어갔다. 대구문학관 제공

"백열등 아래/ 빛의 수심 깊은,/ 파도 들이치는 동굴 같은/ 흐릿한 술판//시보다 독한 말들을 탄 술을 마셨네/ 파도 들이치는 동굴 속이었네//전쟁 중이었고,/ 밀려난 생들은 술 맛이 쓰디 썼네/ 생고구마 썬 것이 유일한 안주였네//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는 자주 바닥을 드러냈네//파도 들이치는 동굴 속이었네/ 전쟁 중이었고,/ 어디에서나 내몰린 이들은 시인들이었고, 음악가들이었으며, 그림장이들이었네//… 전쟁 중이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오월에는 골목에 내놓은/ 화분들마다 장미꽃들이 피었네"

이하석 시인(대구문학관 관장)의 시집 '향촌동 랩소디'에 실린 시 '대폿집'의 일부다.
전쟁 중 흐릿한 불빛 아래 가난한 막걸리잔을 기울인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예술가들은 대구의 다방(그 시절 대표적 문화공간으로 출판기념회 등이 열렸음)에서, 음악감상실에서, 함께 부대끼며 그 시기의 불안하고 서글픈 시간들을 견뎌냈다. 당시 으뜸이었다는 대구의 막걸리맛은 그들의 몇 안되는 위안거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화분들마다 장미꽃이 피듯', 예술가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대구'를 토양 삼아 예술의 꽃을 화려하게 피워냈다. 그 힘이 오늘의 대구문화와 한국문화를 있게 했음은 물론이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예술이 빛나던 '그 시절 문화예술의 수도, 대구'로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편집자 주>
 

최인욱
대구 향촌동 살으리다방에서 열린 최인욱의 출판기념회 모습. <대구문학관 제공>

◆전쟁통 예술가들의 안식처, 대구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0년 6월25일, 한반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같은 민족끼리 갈라져 싸우는, 참혹하고도 슬픈 전쟁이었다.
1950년 7월 대구의 피란민은 30만명이 넘었고, 그들은 옛 시청에서 삼덕동에 이르는 도로변 판자촌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전국의 많은 예술가들도 대구로 피란을 왔고, 휴전이 될 때까지 대구에서 생활과 예술을 이어갔다.

당시 대구 사람들은 전쟁에 떠밀려 피란 온 외지인들을 받아들이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대구의 중심가였던 향촌동은 전쟁을 피해 온 안타까운 처지의 예술가들을 따뜻하게 품었다. 그렇게 전쟁은 대구를 문화예술의 수도로 만들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가들과 원래 대구에서 나고 자란 향토 예술가들은 대구 향촌동에 한데 모여 독특한 예술의 향기를 뿜어냈다.

1933년생으로 지난 2015년 별세한 윤장근 소설가는 지난 2010년 발간한 '대구 문단 인물사'에서 "퇴각해 온 군인들과 피란민 대열이 온통 거리를 메웠지만, 대구 사람들은 이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서도 정이 든 대구를 잊지 못할 정도로 인심이 좋았고 넉넉한 데가 있었다"며 "당시 수많은 문학인들도 대구에 와 피란살이를 했고, 피란 문인들은 다방이나 막걸리집에서 시름을 달래곤 했다"고 회고했다. 

 

예술적 토양 갖추고 있던 대구

외지인들에게 인색하지 않은 情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예술가

다방-막걸리집서 시름 달래며

피란예술 창작의 열정 불태워

독특한 문화예술의 향기 물씬


물론, 당시 피란 예술가들이 대구의 예술적 분위기를 풍성하게 한 것은 맞지만, '예술의 도시, 대구'의 토양은 이미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미 가꾸어져 있었다.
대구와 경북은 1900년대 초반 남부럽지 않은 문화적 배경을 갖추고 있었던 것.
일제강점기의 비극 속에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이상화, 현진건, 이장희, 백기만 등이 대구 출신이었고, 안동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1920년부터 1937년까지 대구를 근거로 작품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기 전국의 예술가들이 여러 지역 중 대구를 찾은 이유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분명한 점은 이처럼 기존에 대구·경북의 예술적 토대가 막강했기 때문에 대구를 중심으로 피란기 예술이 만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1950년대 초반 미국 음악잡지에 실린 대구 향촌동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의 모습. 이곳에서 전봉건, 최태응, 양명문 등 피란기 많은 예술가들이 바흐와 드비쉬, 리스트의 음악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문학관 제공>

햄릿
1950년대 대구 문화극장에서 공연된 '햄릿'의 한 장면. 당시 대구에는 문화예술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피란을 오면서 한때 '문화예술의 수도'로 통하기도 했다. <대구문화 제공>
◆구상부터 이중섭까지… 향촌동이 품은 예술가들
1950년대, 휴전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 대구에 와 향촌동 다방에서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재화가 이중섭이다.

흔히들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도시'라면 1900년대 전후의 프랑스 파리를 떠올린다. 파리가 한창 예술의 전성기이던 때 모네와 졸라, 헤밍웨이, 프루스트, 피카소, 에릭 사티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예술가들이 그 도시를 거쳐갔다.

70년 전 대구에도 만만치 않은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 시기 이 나라 예술가들에겐 대구와 향촌동이 파리였고, 몽마르트르·몽파르나스(예술가들이 모여들던 파리의 지역)였다.
마해송,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동리, 최인욱, 서정주, 유주현, 양명문, 오상순, 전숙희, 황순원, 최정희, 김윤성, 김송, 김팔봉, 구상, 김동진, 정비석, 최태응, 유치환, 전봉건, 김종삼, 성기원, 박인환, 전숙희, 장덕조 등 한국전쟁기 대구에서 예술활동을 하던 문인과 화가, 음악가 등 예술가의 이름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한국 문단과 미술을 대표하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예술가들이 70년 전 대구의 거리를 거닐었던 것이다. 예술가들이 약속이나 한듯 향촌동에 모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향촌동에는 지금으로치면 카페나 문화예술 공간이랄 수 있는 다방들이 많았고, 음악감상실과 극장 등 전쟁통에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져온 비극과 슬픔,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당시의 예술인들은 향촌동에서 잠시나마 낭만의 시간을 가졌다. 대구에 피란하고 있던 문인들은 직접 연극 공연을 하기도 했다. 대구 골목골목의 다방과 음악감상실에서 그들은 예술을 논하고,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고, 출판기념회도 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애틋하게 예술의 열정을 태웠다.
노진실기자 know@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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