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대구경제 호시절
대신동 서문시장 품은 동산동
대구 갈비 1번지로 성장
사라진 원조 진갈비 뒤이어
국일·대창·성주갈비가 명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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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 |
대구의 돈이 중구 대신동네거리에 집중되던 시절이 있었다. 1960~70년대다. 대구경제는 탄탄대로였다. 경부선(1970년)까지 등장하지 않아 대구는 전국 최강 경제특구로 호시절을 누릴 수 있었다.
섬유메카였던 대구는 부산과 함께 전국 대다수의 피륙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제일모직, 삼호방직, 대한방직, 코오롱, 한일모직, 갑을과 동국…. 그 축은 단연 서문시장을 품은 중구 대신동이었다. 금은방거리 옆에 대구은행 대신동지점이 들어선다. 염료·실·양말·타월, 그리고 갈비골목과 선순화된 동산동은 한때 '돈산동'으로도 불렸다. 돈냄새를 잘 맞는 사업가들이 별별 공장을 세웠다. 북성로 공구거리는 청계천 세운상가와 쌍벽을 이룬다. 배불뚝이 사장이 급증하던 시절이었다.
6·25 전쟁 피란지였던 대구. 난리통이었지만 가산산성에서 쏘아 올린 박격포가 몇 발 대구역전에 떨어진 것 외엔 별다른 전쟁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팔도의 상권이 집결되면서 한국 육개장의 신지평이랄 수 있는 '따로국밥'까지 파생된다. 이 국밥은 장터국밥과 주막국밥, 그리고 곰탕, 가정식 소고깃국, 그리고 선지해장국이 서로 얽히는 과정에 태어난 대구만의 시그니처국밥이랄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산업인프라 덕분에 대구경기는 수직 상승된다. 당시 '양키시장'으로 불렸던 교동시장은 그 억척같은 생활력을 가진 북한 피란민에 의해 장악된다. 이들 피란민은 유독 외식업을 장악해 들어갔다. 그중 냉면업은 그들의 독무대였다. 강산면옥을 필두로 대동면옥, 부산안면옥, 대동강까지. 그 4인방이 대구 냉면계를 쥐고 흔들었다. 그 냉면 옆에는 어김없이 북한식 불고기가 매칭된다.
호경기 리더는 역시 사장들. 그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실력자(정계와 관계)와 특수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 밀담공간이 바로 요정과 갈빗집이었다.
대구의 대표적 요정인 청수원(현재 곽병원 초입 태남빌딩 자리)은 2군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가 사령관 장도영을 제치고 5·16거사를 모의하던 장소였다. 대표마담 김태남은 여걸이었다. 비록 요정업을 했지만 박태준이 포항제철을 일으킬 때 뒤에서 묵묵히 군자금을 지원사격한 것으로 전해진다.
5·16 어름, 대구에 전국구 불고깃집과 갈빗집이 계산동과 동산동에서 연이어 태어난다. 바로 '계산땅집'과 '진갈비'다. 중구 달성동 출신인 박복윤이 차린 계산땅집은 얼추 30년 세월 대구의 식도락가의 입을 즐겁게 했다. 거기는 '회식문화 1번지'였다. 그 땅집 때문에 대구는 일시에 불고기 돌풍에 휩싸인다. 팔군식당은 돼지불고기의 신지평을 연다. 하지만 그 땅집도 2000년대로 넘어오지 못하고 문 닫고 만다. 현재 대구의 마지막 불고기식당은 시청 근처 '원도매식당'이다. 여기 가면 아직도 배가 불룩하고 구멍이 뚫려 불기운이 넘나들 수 있게 제작된 놋쇠 불고기 불판을 볼 수 있다.
계산땅집보다 2년 늦게 태동한 진갈비는 진홍렬 사장의 꿈의 공간이다. 동산약국 뒷골목, 일명 원사·타월골목으로 알려진 거기에서 갈비돌풍을 일으킨다. 서울 마장동에서 대구 첫 갈비 커팅기를 구해왔다. 한때 그 갈비골목에 태동, 먹쇠, 동산, 성주 등 16개 업소가 밀집했지만 이젠 성주식당 하나만 남았다.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그 진갈비도 문 닫았다. 그래도 40년 이상 역사의 고성동 대창가든과 대신동 국일생갈비가 대구경기의 부활을 다짐하며 쾌속항진 중이다. 위클리포유 9월11일자에 미주알고주알 '대구의 갈비연대기'가 이어지니 애독 바란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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