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기억으로 소환되는
궁핍했던 시절 즐겨 먹었던
마가린김치찌개·납작만두…
추억의 맛집 여행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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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
1965년생이니 전쟁이 끝난 폐허 속에서 배고픔을 겪은 베이비붐 세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재료의 부족함을 메꾸면서 꿀맛 같은 밥상을 만든 건 순전히 어머니의 탁월한 음식 솜씨였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마가린을 한 숟가락 듬뿍 넣은 김치찌개다. "김치찌개에 마가린이라니"하며 놀라겠지만, 글을 쓰는 지금도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추억의 맛이다.
김치는 한국인 밥상의 영원한 동반자다. 어느 집이든 시어 버린 김치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다. 무엇을 넣어도 김치찌개는 서민들의 한 끼 밥상을 거뜬히 행복으로 이끈다. 마가린 역시 서민들을 위해 태어난 식품이다. 프랑스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나폴레옹 3세 시절 근로자나 군인들에게 버터는 너무 비쌌다. 그래서 대용품으로 값싼 마가린이 탄생하게 됐다.
마가린의 탄생 배경처럼 돼지고기조차 풍족하게 먹을 수 없던 시절, 어머니는 마가린으로 동물성 기름 맛을 김치찌개에 담으셨던 것이다. 지금은 마가린이 트랜스 지방 과다로 반 건강식품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지만, '어머님표 마가린 김치찌개'는 추억의 '소울푸드'다. 안타까운 것은 다시 끓여 달라고 해도 이미 예전의 미각을 잃은 팔순 노모는 그 맛을 못내신다. 하지만 그 김치찌개를 생각하면 항상 행복했던 저녁이 추억으로 소환된다.
어디 그뿐이랴. 어린 시절 먹었던 학교 앞 10원짜리 떡볶이와 핫도그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그 맛을 생각하면 나는 추억 속에서 여전히 대구초등학교 운동장을 뛰논다. 유신학원 강사였던 아버지를 기다리다 보면 아는 재수생 형들이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주곤 했다. 그 분식집 이름도, 같이 먹었던 형들의 이름은 모두 머리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 집의 라면 맛을 생각하면 아직도 미슐랭 가이드 맛집보다 더 침샘이 자극된다.
홍옥, 국광 등 새콤달콤 다양한 사과를 비롯해 처음 서울에 와서 '정구지'라고 했다가 친구들로부터 대구는 달구지도 먹느냐고 놀림 받았던 부추전, 엄마 따라 시장 갔다가 먹던 금방 나온 뜨끈뜨끈한 오뎅, 나중에야 오코시가 일본 말인줄 알았지만 명절 때 가득 쟁여놓고 먹던 강정 등 모든 음식이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박찬일 셰프의 말처럼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이밖에도 납작 만두, 따로국밥, 막창, 동인동 갈비찜, 서문시장 닭똥집 튀김, 북성로 연탄불고기와 우동 등등 아직도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몇 곳은 서울에도 분점을 냈기에 찾았지만 역시 음식은 추억과 함께 버무려 먹어야 제맛이란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대구를 떠나온 지 40년이 넘었는데, 추억의 음식점들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몇 년 전 전국지방변호사회장 협의회에 참석했다가 대구 근대 골목기행을 하였다. 동산의료원 청라언덕에 서 있는 '동무생각' 노래비를 보며 옛 친구들을 떠올렸다. 떡볶이 한 접시, 핫도그 하나, 라면 한 그릇을 함께 나누던 동무들은 어디에서 무엇 하며 살고 있을까. 짝사랑하던 같은 반 여학생 친구는 지금쯤 할머니가 되었으려나.
조만간 옛 동무들과 어울려 다니던 추억의 맛집 여행을 위해 대구를 방문해야겠다. 변함없는 맛을 간직하며 대를 잇는 노포(老鋪)는 언제 가도 추억을 소환해주기 때문이다. 그 전에 오늘 저녁에는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모든 안주의 동반자 '금복주'부터 한 잔 해야겠다. 술에 알딸딸해지면 추억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라고 하는데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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