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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수창청춘맨숀(2)…21C와 공존할 수 없는 어둠 "잘 가시게" 예술로 스포트라이트

2021-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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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맨숀은 과거와 미래의 동행을 예술가적 관점에서 조명하려고 한다. 제1기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한 윤보경은 철거 진행 중인 사창가, 자갈마당의 폐허에서 가져온 간판·TV·폐기물 등으로 설치작품을 만들었다. 이는 낡은 성문화를 떠나보내는 하나의 진혼곡이었다. 〈수창청춘맨숀 제공〉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온 이 맨숀의 연대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1905년 봄에 경부선이 개통된다. 졸지에 일본 투자꾼의 타깃이 된 곳이 바로 대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구역전이다. 애초 일본거류민단은 현 동아쇼핑 근처에 역이 조성될 줄 알았다. 아무튼 대구역은 돈을 몰고 왔다. 근처 북성로 동쪽 초입에는 엘리베이터가 장착된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이 개점한다. 그 길을 따라 서쪽 끝으로 가면 속칭 '자갈마당'으로 잘 알려진 유곽(遊廓)이 들어선다. 그 유곽은 일제의 철저한 관리·감독하에서 움직인 일종의 공창 구역이었다.

일제 때 자갈마당 도원동 3가는 '야에가키쪼'로 불렸다. 1909년 대구콘서트하우스 맞은편에서 정미소를 하던 대화양행 대표 다무라 곤조오가 유곽 독점영업권을 따낸다. 광복 후에는 자연스럽게 사창가로 변질 됐지만 6·25전쟁 때만 해도 그곳 나름 대로의 '낭만'이 굴러다녔다. 특히 대구로 피란 온 시인묵객들도 자신 역시 '대구의 보들레르'라 으스대며 그곳을 출입했다. 당시 서문로에 있던 영남일보 편집국장이었던 구상 시인도 그 공간에서 낚아 올린 여러 일화를 훗날 '초토의 시'(1956·청구출판사)란 시집으로 엮어낸다. 구상은 특히 '초토의 시 7'에서 '시인은 창녀를 샀다'면서 자신도 거길 출입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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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원의 옥상 작품'HERE WE ARE'. 그 동안 모두 687명의 청년예술가가 여길 품었다. 작가들은 기획자와 머리를 맞대면서 자신의 전시 구도를 잡아나간다.
자갈마당의 역사
일제가 대구역전에 만든 공창구역
한때 시인묵객들도 으스대며 출입
100여년 음습하게 있다 역사속으로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철거현장기록
수창맨숀 레지던시 작가의 첫 작업


◆자갈마당을 품은 맨숀

7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수창맨숀 제1회 레지던시 프로그램(2019)에 참가한 윤보경 작가. 그는 지워버릴래야 지워버릴 수 없는 수컷들의 성욕사가 아로새겨진 저 자갈마당을 위해 그만의 '진혼곡' 같은 설치미술을 만든다. 영남대 미술대학 미술학부에서 트랜스아트를 전공한 윤보경은 '이 맨숀이 낡음에서 새로움으로 거듭 태어났듯 사창가문화도 거듭나야 된다'고 다짐한 뒤 과감하게 현장을 찾는다. 역사적인 철거를 앞두고 폐업한 자갈마당 업소를 수차례 방문해 '어서 오십시오 51호'란 상호가 적힌 간판, 방안에 나딩굴던 TV 등을 직접 주워오고 건물의 와해 과정까지 동영상으로 담아낸다. 붉은 조명이 드리워진 그녀의 전시물 앞에 서면 마치 감상자가 사창가 밀실 안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윤 작가의 작품과 관련해 미학박사 허정선은 "수창맨숀은 자갈마당과 함께 걸어 온 대구의 오랜 역사를 수면 밖으로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묻어버리지 않고 역사적 기록물로 기념하는 이 맨숀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는 공적 활동의 문화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자갈마당 옆에 수창초등학교가 있었다. 이율배반이고 모순이었다. 자갈마당은 숱한 논란에 개의치 않았고 그렇게 100년 이상 음습하게 서 있다가 올해 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참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비참한 공간 옆에 가장 풍족한 공간 하나가 자갈마당과 동행했다. 바로 전매청 대구 연초제조창 직원들을 위한 사택이었다. 사택의 아이들은 수창초등학교에 다녔고 바로 옆에는 사창가가 있었다. 희망과 절망이 오버랩 되던 그 공간. 그 경계미학의 정점에 수창맨숀이 꽃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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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청춘맨숀은 분기별로 한 번씩 기획전시를 하는 한편 수창청춘극장, 수창 피크닉, 레지던시, 청춘 아팝트 등 서로 다른 예술을 만나게 하고 시민과 예술가의 동행을 마련하고 있다.
청춘과 손잡고 재탄생한 수창맨숀
20년 가까이 방치된 옛 전매청 사택
2016년 문체부 '문화재생사업' 선정
리모델링 아닌 예술가들이 붓들고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곳으로…


◆청춘맨숀 재탄생 스토리

청춘맨숀은 과거 전매청(현 KT&G) 대구 연초제조창 옆 사택 자리에서 '연꽃'처럼 태어난다. 다시 말해 '도심문화재생사업'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1976년부터 20년간 사택으로 이용되었지만 1999년 전매청은 폐쇄된다. 20년 가까이 유휴공간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공간은 바로 옆 미창(米倉)과 함께 한 세기 전의 문화 범주에서 멈춰 서 있었다. 더 이상 21세기와 공유되지 못했다. 북성로 연탄석쇠돼지불고기 골목이라도 없었더라면 수창동의 밤은 유령의 은신처가 되었을 것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 근처 주민들은 이 공간이 여간 눈엣가시가 아니었다. '어떻게라도 치워달라'며 숱하게 민원을 제기한다.

그런 어느 해, 이 공간에도 쨍하고 볕이 든다.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활용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되어 새로운 예술적 숨결로 채워진다. '맨션(Mansion)', 아니면 맨숀? 맨션이 표준말이지만 그걸 버렸다. 예전 그대로의 정서를 살리기 위해 '맨숀'을 선택했다.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B급 광고문구 같지만 그 뉘앙스가 뉴밀레니얼 청년문화와 제법 어울렸다.

'낡은 건물의 외벽을 되살려 지난 세월을 보존하자.'

그렇게 구호를 외쳐댔다. 건물 리모델링, 그건 공사업자의 몫이 되어선 안 됐다. '이 맨숀이 자기 자화상'이라 여긴 자발적 청년예술가들이 직접 망치와 붓을 들었다. 과거의 오브제를 최대한 살려 미래지향적 분위기로 마감을 했다. 그렇게 해서 수창맨숀은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이 사업이 잘 굴러가게 만든 기폭제가 있다. 2014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역문화진흥원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다시 살아난 기억의 공간'이란 주제의 '유휴공간 문화재생 사업'이다. 공장, 창고, 학교, 양조장, 군부대 등 원래 기능을 잃고 방치된 유휴공간을 지역 정서에 맞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그런 곳이 전국에 40여 곳 되는데 수창맨숀도 그중 하나다. 강원도 영월 북면농공단지 관리사무소는 '갤러리 온 팩토리',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구상가 내 유휴 목욕탕 시설은 '시흥문화발전소 창공', 부천시 삼정동 쓰레기 소각장은 '부천아트벙커 B39', 경기도 수원시 수원 산단 내 폐수처리장은 '고색뉴지엄', 청주시 연초제조창 담뱃잎 보관 창고는 '동부창고', 조치원 정수장은 '조치원문화정원', 영주시 KT &G 연초제조창은 '148아트스페이스', 부산 고려제강 수영공장은 45년간 와이어를 생산하던 공장인데 지금은 'F1963 현대모터스튜디오 부산'이 되었다. 201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활용된 이후 부산의 상징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돼 왔다. 이밖에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농협비료창고는 '삼례책마을', 나주 잠사공장은 '나주나빌레라문화센터', 담양군 양곡창고는 '담빛예술창고', 제주대병원은 창작스튜디오 겸 예술공간 '이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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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맨숀예술블랙박스' 같은 이 공간은 3개의 동이 'ㄷ'자 형태로 '따로 또 같이' 유연하게 운영된다. 전시공간·야외·옥상·지하창고·테라스 등 원하는 어느 곳이든 무대가 된다. 2018년 청년액션 행사 모습.
대구현대미술가협회가 위탁 관리
"청춘예술과 맨숀의 밝은미래 봤다"
미디어아트·음악·무용·퍼포먼스…
청년예술가의 실험정신 적극지원


◆ 수창 청춘을 리노베이션

수창맨숀은 2017년 12월 개관 직후 대구문화재단에서 9개월 정도 임시 운영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연속적이고 입체적 기획이 돋보이는 사업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냥 방치된 공간 하나를 고쳐놓았다는 수준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용할 만한 매력포인트가 많아 보였다. 이에 자극받은 대구시는 위탁 공모를 통해 운영 주체를 선발한다. 대구현대미술가협회가 위탁기관으로 선정되어 2018년 9월18일부터 운영 중이다.

'악빠리 정신'으로 무장한 김 관장은 '맨숀 전도사'. 공모용 기획서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 보름 정도 귀가를 포기하고 자기 작업실에 배수진을 친다. 하루 3시간 정도만 잠만 잤다. 절망하는 청춘예술과 맨숀의 밝은 미래를 봤기 때문이다. 그는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절실했다. 그때까지 대구현대미술가협회를 위한 제대로 된 공간조차 없다는 사실에 적잖이 낙담하고 있었다. 시내 오오극장 등 괜찮은 문화공간이 보이면 그곳의 특징과 문화콘텐츠를 면밀히 메모해나갔다. 틈만 나면 남산동, 계산동, 종로, 북성로, 서성로 등 중구 원도심 빛바랜 한옥골목까지 손금 보듯 훑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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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3일 그랜드 오픈을 위한 팡파르가 울렸다. 그해 12월31일까지 '빛나라 빛내라'란 주제로 개막공연을 올렸다. 개막작은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퍼포먼스였다. 미디어, 사운드아트, 스카이 퍼포먼스, 무용, 소리, 마임 등이 융·복합되었다. 수창맨숀발 실험예술의 신호탄이었다. 그것을 필두로 초미니 공연형식의 수창청춘극장, 야외조형전, 테라스 공간을 새롭게 부각시켜주는 미디어스토리전, 청년작가육성 프로젝트 전….

새로운 문화기획적 수혈을 위해 행위예술가 한 명을 감독으로 모셔온다. 2013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 서귀포로 내려가 이중섭거리와 맞물려 돌아가는 '서귀포문화빳데리충전소'를 오픈한 김백기(한국실험예술정신 대표)씨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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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청춘맨숀 입구 전경. 왼쪽부터 A동, C동, B동.

◆긴박한 주민간담회의 나날

오픈을 앞둔 김 관장의 그해 시월은 너무나 분주했다. 꿈을 갖고 이 맨숀을 응시하니 할 일이 천지였다. 다소 반문화적이고 냉소적으로 관망하던 주민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급했다. 툭하면 주민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굴러들어온 돌은 우선 박힌 돌을 제대로 배려해야 일이 제대로 굴러 간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난제는 청춘과 예술의 접목이었다. 지역에서 죽을 때까지 목숨 걸 청년예술가 현황 파악이 급했다. 지역 예술 관련 대학에서 배출되는 학생은 많았지만 전업예술가로 가는 재원은 희귀했다. 10명 중 1명도 전업의 길로 못가는 게 현실이었다. '대구만 고집해선 안 된다'고 봤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수창청춘맨숀(3)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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