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다습한 곳, 땀 많이 흘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고당도 열대과일
추운지역 체질에 맞게 땅이 공급해주는 밀·콩·감자·비트·당근…
토질·기후에 맞춰 자연이 건강하게 제공 '지역 맞춤형 먹거리'
유럽인 위한 설탕 생산위해 신대륙 팔려간 노예들이 대규모 수확
20세기 중반부터 설탕 소비량과 비례하며 당뇨병 사망자도 급증
필자는 한동안 필리핀에서 살았다. 날씨가 뜨겁고 땀을 많이 흘리는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는 그 체질에 꼭 맞는 고당도 고에너지 식품을 많이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재배가 무척 어려운 바나나, 파파야, 파인애플, 코코넛 같은 식물이 그곳에서는 그냥 땅에 꽂아만 두어도 병해충도 거의 없이 열매를 맺을 정도로 재배가 쉽고 사철 흔하게 생산된다. 그러나 두리안·망고 같은 과일은 그곳에서도 많은 농약 살포 없이는 재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 철만 생산된다. 반면에 한국에서 흔한 사과, 배, 복숭아 등은 그곳에서는 재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사람들에게는 바나나, 파파야 등이 몸에 귀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사과, 배 등이 더 좋다는 게 자연생태계의 암시다. '과일의 왕'이라 불리우는 값비싼 두리안은 조금만 생산되고 싸구려 바나나는 지천으로 깔렸다고 불평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 또한 더운 지역 사람들의 체질에 맞는 최적의 맞춤형 먹거리를 공급하는 자연의 생산 공급원칙에 담긴 사려 깊은 배려임을 이해하게 되면 그 정교한 과학적 생산시스템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토불이(身土不二)
필자는 러시아 북쪽 하바로브스크에서 한동안 살았다. 5월이 되어서야 빙토가 녹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간신히 봄풀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6월이 되면 아침 일찍부터 햇빛이 내리쬐고 밤 10시가 넘도록 뜨거운 햇살을 퍼붓는다. 단기간 산야의 농산물이 급속도로 생산된다. 그런데도 열대지방 과일은 물론 사과, 배, 복숭아 같은 달콤한 과일류는 생산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배추·상추 같은 엽채류, 감자·비트 같은 근채류, 토마토·수박 등과 같은 과채류는 농약 살포가 없이도 잘 자란다. 한여름 실컷 먹을 것은 먹고 긴 겨울 저장해 놓고 먹을 수 있는 식품들은 불과 3~4개월 만에 집중적으로 생산된다. 9월에 들어서자 벌써 산천의 농산물들은 모두 성장을 멈춘다. 수확과 동시에 한기 때문에 모두 시들어버린다.
그런 추운 지역에서는 고당도의 열대 과일이나 온대지방의 사과, 배, 포도 등 당분이 많은 과일은 가능한 한 안 먹는 게 좋다는 게 자연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당분은 적지만 비타민 등 다른 영양성분이 많은 엽채류·근채류·과채류는 여름철에 충분히 먹어두고 겨울에는 저장된 밀, 콩, 감자, 비트, 양배추, 당근 등을 먹으면 된다. 겨울날 영양실조 없이 충분히 지낼 수 있도록 한대지방의 '지역 맞춤형 먹거리'가 땅이 제공해준다. 땀을 많이 흘리지 않고 활동량도 줄어드는 겨울철, 이때는 당분이 많은 식품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 자연의 빈틈없는 계획인 것이 분명하다.
몽골의 척박한 토양과 건조한 기후에서는 어떠한 농작물 재배도 어렵다. 풀을 따라 이동하는 목축업 외에는 어떠한 먹거리 생산도 용이하지 못하다. 그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 땅에서 가장 흔하게 생산되는 육류와 유제품이 주요 영양공급원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인위적으로 동물에게 곡물 사료를 먹이는 일도 없고 인공수정도 없다. 밀집 사육이나 항생제 투입도 없다. 그야말로 자연산 풀만 먹고 자란 자연산 고기다. 채소와 과일은 연중 내내 얻기가 거의 불가능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사시사철 고기만 먹어도 건강하게 잘 살아간다. 그게 몽골인에게 딱 맞는 신토불이 식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괜히 몽골 유목민들의 식성을 흉내를 냈다가는 큰 탈이 난다. 관련 증거가 수없이 확인되고 있다.
신토불이는 단지 '우리 땅의 우리 농산물을 먹자'고 애국심에 호소하는 구호가 아니다. 그 땅의 사람들에게 '지역 맞춤형 먹거리'를 제공하는 생태계의 건강원칙이며 생산원칙이다. 생태계의 이러한 기본적인 생산원칙을 부정하거나 역행하게 되면 자연은 파괴되기 마련이고 인체는 반드시 망가진다.
무수한 생명을 희생해 얻은 수확물인 설탕을 실컷 먹게 된 유럽인들. 그들 가운데 당뇨병 환자도 치솟았다. |
신토불이 생태계 법칙을 무시한 결과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가 여럿 있다.
17~18세기에 인도양을 중심으로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의 역사가 바로 그 실증적 사례다. 스페인·포르투갈·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국가들이 남아시아에서 나오는 사탕수수의 달콤한 설탕 맛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새로 발견된 신대륙인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를 대량 재배하고 그렇게 가공한 설탕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게 당시 고수익 무역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술과 총기·화약을 아프리카 노예상들에게 수출했다. 아프리카에서는 흑인들을 노획해 아메리카로 수출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게 이른바 대륙 간 삼각무역이다.
그렇게 1천20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이 아메리카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대서양 횡단 동안 노예들은 두릅으로 엮어진 굴비처럼 쇠사슬에 엮인 채 배 밑바닥에 방치됐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 탓에 20%의 노예들은 배안에서 죽어갔다.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도 극심한 노동 착취와 풍토병에 시달려 3년이 지나면 그중 절반도 생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비참한 흑역사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수한 생명을 희생해 얻은 수확물인 설탕을 실컷 먹게 된 유럽인들의 건강에 대한 임상 실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1700년 영국의 1인당 설탕의 연간 소비량은 1.8㎏, 1800년에 8.2㎏으로 증가했다. 이때까지 당뇨병 사망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850년에는 설탕 소비량이 16.3㎏, 20세기 중반 설탕 소비량은 45㎏ 이상으로 증가했다. 덩달아 당뇨병 환자는 인구 10만명당 6천~7천명까지 치솟았다. 설탕과 당뇨병·고혈압·심혈관 질환 발병률과의 상관관계에 관한 학술적 증거는 이외에도 수두룩하다.
◆자연을 무시하면 약이 독
자연생태계는 치밀하다. 정확한 계산에 따라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건강을 고려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당시 중남미 지역에서는 설탕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다른 모든 품목의 생산을 제한했다. 대부분의 좋은 땅은 사탕수수밭으로 변한다. 윤작도 혼작도 없이 매년 사탕수수만을 단작으로 연작 재배한다. 그 결과 토양은 황폐해졌고 생태환경은 급속도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도 이런 반생태적 농법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지금도 열대지방에서 집중 생산된 매년 1억7천만t이 넘는 설탕이 세계인들의 혀의 자극을 위해 신나게 소비되고 있다.
11세기 아라비아 의학자 이븐시나는 '설탕이야말로 만병통치약'이라고 단언했다. 원래부터 토착 농산물로 적당량 자라고 있었던 게 사탕수수다. 그 지방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토착민들에게 사탕수수는 전통 상비약 같은 아주 유용한 식품이자 약재였다. 그러나 그 사탕수수가 그 자리를 떠나 다른 땅 사람들의 대량 기호식품으로 전락되고 그것은 결국 끔찍한 독이 되고 말았다.
누군 '21세기 최대의 마약, 인류의 최대의 공공의 적은 바로 설탕'이라고 지적한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데우스'에서 '현재 설탕은 화약보다 더 위험하다'고 썼다.
이기송 (SC농업발전연구소장·경제학 박사) |
ISC농업발전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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