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웹툰캠퍼스 활동을 통해 대구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실패 두려워하지 말라...성공은 포기않는 정신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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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현세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각종 미디어에서 활동이 뜸하다. 근황이 궁금하다?
"이제 늙었다. 세상은 젊은이의 것이지 노인의 것이 아니다. 또한, 만화 콘텐츠 시장에서 웹툰이 인기를 얻으면서 출판시장에 익숙했던 나는 (시장에서) 멀어졌다. 게다가 세종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중들과 멀어진 측면도 있다. 최근 '천국의 신화' 연재 후 3년 정도 쉬었다. 현재 한 포털에 나갈 작품을 준비 중이다. 2년 정도 연재 분량 작품이다. '우칸주(만주어로 도망자)'라는 작품인데 만주와 연해주에서 도망자로 살아가는 조선의 마지막 무사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인들과 마적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나이 든 남자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점에서 지금의 이현세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이현세 작가는 1980~90년대 대한민국 만화계의 '전설'로 손꼽힌다. 원동력은 무엇인가?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원동력이었다. 위험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 살아가는 청춘의 도전 의지를 작품에 담은 것이 주목을 받았다. 독자들은 이러한 작품세계가 스며든 '까치' 등의 캐릭터를 재미있게 봐주셨다. 군사정권 아래인 198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도 이현세 만화의 인기에 영향을 미친듯하다. 당시는 민주화 열망이 컸지만, 대학마다 탱크가 들어가 있던 시기였다."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가장 애정을 쏟은 작품과 캐릭터는?
"초창기 작품 중 '국경의 갈가마귀'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조선과 청나라로부터 버려진 국경의 조선인 마을에서 부모를 찾아헤매는 '가마귀'라는 상징적 존재의 이야기다. 구로공단 여공들의 이야기를 그렸던 '며느리밥풀꽃', 제가 처음으로 했던 SF 작품 '아마게돈'도 기억에 남는다. 캐릭터는 만화의 핵심 중 하나인데 이현세만의 캐릭터 라인업이 있다. '오혜성'과 그의 라이벌인 '마동탁', 메시아 역할을 하는 '엄지', 여기에 늘 든든한 친구 이미지의 '백두산'을 비롯해 '배도협', '조상구' 등의 캐릭터가 기억에 남는다. 캐릭터 라인업 완성 후부터 어떤 이야기를 할까 신경 썼지 캐릭터를 고민하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악역인 마동탁 캐릭터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지금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노력형이며 스마트한 마동탁 캐릭터의 인기가 최고다. 옛날에는 가족과 국가, 민족 등의 '우리'라는 개념에서 영웅이 탄생했지만, 지금은 스스로 구도의 길을 찾는 마동탁과 같은 캐릭터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 혹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때와 힘들었던 때를 꼽는다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현실 도피일수도 있지만, 노인의 삶이라는 것이 젊은이의 삶과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 들어서는 손목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다. 격렬한 투쟁에서 벗어나 평화를 찾은 느낌이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고교 졸업 후 습작기를 가질 때였다. 그때 내가 작은집에서 큰집으로 양자 온 것을 알았고, 대입 때는 색약으로 좌절했다. 흑백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만화계에 뛰어들었지만, 당시는 만화가 죄악시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 수유리에서 만화잡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수유리에 있는 모든 괘종시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예민해져 잠을 못 잤다. 하는 일에 대한 어떠한 비전도 없었기에 매우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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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만화계의 구심점이 출판이었다면, 지금은 웹툰이 중심이다. 출판과 웹툰 모두 '구독하는 문화'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사이즈'와 형태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는 만화방을 중심으로 구독시장이 형성됐지만, 지금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인터넷 구독시장으로 변화했다.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것을 최우선 시 하던 과거는 사라졌다. 세계인들의 공감대를 얻어야 'K-웹툰'의 주류 콘텐츠가 될 수 있다. 현재 'K-웹툰'은 순식간에 8~9개국으로 번역돼 퍼져나가고, 총 100여 개 나라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국내에서 해외로 볼륨이 거대해진 것이다."
△대구웹툰캠퍼스 명예교장 등 후학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나?
"지역에서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고향이 경북 경주여서 경주의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고, 만화로 경주를 알리는 일에 앞장섰던 기억이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지난해부터 대구웹툰캠퍼스 명예교장직을 맡았는데, 아직 대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앞으로 대구웹툰캠퍼스 활동을 통해 대구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구의 젊은이들에 대해 알아가겠다."
△대구경북 만화 종사자들을 위한 조언이 있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성공은 실패의 부재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정신에서 나온다. 각박한 요즘 세상은 젊은이들이 성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특히 대구의 경우 지역이라는 한계 탓에 콘텐츠에 대한 수익을 보장받기 어렵다. 이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 자신에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인기 작가가 되더라도 인문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없이는 오래가기 힘들다. 인문학을 공부해야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
△경북 경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떤 추억이 있나?
"내가 어릴 때는 경주 문화재에 담이 없었다. 김유신장군묘는 물론 석굴암과 불국사도 그랬다. 신라 천년의 자취와 역사가 집 앞마당에 깔려있었던 셈이다. 나는 신라의 유산과 뒹굴고 자라면서 신화와 전설을 좋아하게 됐다. 이러한 경주의 문화유산은 만화가 이현세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실제로 역사 만화를 많이 그렸다. 특별한 한 종교에 귀의해 있지는 않지만, 불교와 기독교보다는 토속적 신앙이 강한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릴 때 국립경주박물관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향토사학자들로부터는 김유신과 천관녀 얘기 등을 들었다. 동화책 한 권 볼 수 없었던 시절, 경주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대구경북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이현세는 '경북의 아들'로 태어났고 대구경북의 사랑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프로작가 데뷔 후 43년 동안 활동할 있던 것도 수많은 팬들의 격려 덕분이었다. 앞으로도 그 은혜 잊지 않고 '경북의 아들'로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 나이가 드니 마지막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수많은 노년의 죽음을 봐 왔다. 이현세의 얼굴이 타인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길 기원한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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