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까지 佛 노예무역의 거점지
20세기 아름다운 관광명소 재부상
도시의 랜드마크 '생트카트린 교회'
서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교회
시인 보들레르도 예찬한 '구 항구'
가옥·요트 어우러진 독특한 풍광
수많은 예술가에 영감 불러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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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플뢰르 구 항구. |
옹플뢰르는 11세기에 형성된 항구 마을로서, 프랑스 노르망디 칼바도스 주에 있는 코뮌이다. 코뮌은 12세기에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성립되었다. 본래 서로 평화를 서약한 주민의 공동체로서, 왕이나 영주로부터 특별히 인정받은 사회단체이다. 이러한 주민 자치제는 중세 말기에 왕권의 간섭이 강화되고 전쟁이 이어지면서 쇠퇴해갔다. 그러나 1871년의 파리 코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개념은 한동안 존속하였다.
옹플뢰르는 역사적으로 중세 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의 전초기지였고, 이어진 대항해시대의 거점 항구였다. 옹플뢰르는 센강이 넓게 펼쳐져 영국해협으로 흘러드는 좌안에 위치한다. 16세기 들어 대항해시대가 본격화하자 옹플뢰르 항구를 통해 많은 탐험가들이 항해에 나섰다. 1503년에 비노 폴미에르드 곤빌은 남미 브라질로, 1506년에 장 드니가 뉴펀들랜드섬과 세인트로렌스로 떠났다. 1608년에는 사무엘 드 샹플랭이 조직한 탐험대가 캐나다로 가서 지금의 퀘벡시를 건설했다. 항구 옆에는 그의 기념비가 있다. 이후 옹플뢰르는 캐나다, 서인도 제도, 아프리카 해안, 아조르 등과 해상 무역을 통해 번창했다. 18세기 말까지 이곳은 프랑스 노예무역의 5대 주요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번성하던 항구는 역설적으로 대항해시대의 풍요 때문에 쇠퇴하게 된다. 지금도 옹플뢰르의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이것은 바닥 면적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도시가 번창했음을 보여준다. 도시의 확장이 어려워지자 이웃한 곳에 다시 항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주도 르아브르(Le Havre)였다. 그렇게 탄생한 르아브르에 무역선들이 정박하면서 도시가 활성화되자 옹플뢰르는 자연스럽게 쇠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옹플뢰르는 20세기에 들어 관광지로 다시 부상했다. 대항해시대의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17~18세기의 건물들이 포옹하듯 붙어 있는 모습은 그림 속 풍경 같다. 예쁜 화랑과 멋진 카페, 아기자기한 수공예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길이 중세의 영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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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트카트린 교회. |
옹플뢰르는 구스타브 쿠르베, 외젠 부댕, 클로드 모네,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등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찾았던 도시이다. 부둣가의 좁은 집들과 정박해 있는 배가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는 구 항구(Vieux Bassin)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구 항구는 17세기 중반 옹플뢰르 도심지의 규모가 커지고 해상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전의 낡고 작은 항구를 서쪽 성벽이 있던 자리까지 넓히면서 얻은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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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항구 노천카페에서 오찬을 즐기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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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석이 깔린 골목길과 눈길을 사로잡는 가게들. |
'악의 꽃'으로 유명한 시인 보들레르도 옹플뢰르를 자주 찾았다. 그의 노모도 말년에 '메종 쥬쥬'에 살았다. 보들레르는 '1845년의 살롱' 같은 미술비평을 비롯하여 여러 대표적인 시들을 등대가 바라보이는 이곳 '슈발 블랑' 호텔 2층에서 썼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가. 구 항구를 바라보고 있자면 보들레르의 시 '여행에의 권유'가 떠오른다.
"보라, 저 운하에 잠자는 배들. 떠도는 것이 그들의 버릇. 그대의 욕망 낱낱이 가득 채우러 그들은 온다, 세상 끝에서. 저무는 햇빛 물을 들인다. 들과 운하와 온 도시를, 보랏빛 금빛으로. 세계는 잠든다, 훈훈한 햇빛 속에서…."
보들레르가 노래한 잠자는 배와 보랏빛 금빛의 저무는 햇빛을 포착하려는 예술가들이 인상파 화가였다. 이곳의 화창하고 맑은 날씨는 인상파의 탄생과 관련이 깊다. 인상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스 화가 카미유 코로가 '하늘의 왕'이라고 불렀던 인상주의 화가 외젠 부댕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부댕은 바다를 중심으로 한 자연의 풍경을 특유의 선명한 색채와 섬세한 터치로 표현해 명성을 날린 화가다. 이곳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있다.
옹플뢰르와 센강이 보이는 19세기 예배당과 2개의 현대식 부속 건물로 이루어진 외젠 부댕 박물관은 1868년 설립되었다. 부댕의 작품을 비롯하여 클로드 모네, 알렉상드르 뒤부르,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 구스타브 쿠르베, 뒤피 등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비롯하여 노르망디 지역의 의상과 머리 장식, 귀족들의 장신구와 레이스, 가구, 인형을 전시하는 지역 역사전시관도 있다.
외젠 부댕은 인상파의 창시자라 불리는 클로드 모네의 스승이었다. 학교 수업을 답답해하던 중학생 모네가 외젠 부댕에게 '밖에서 그리는 풍경화'라는 혁신적인 기법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에도 풍경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스케치만 외부에서 하고 나머지는 실내에서 완성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부댕은 처음부터 끝까지 야외에서 풍경을 완성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부댕보다 열여섯살이나 어린 모네는 부댕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화풍으로 보면 동료이기도 했다. 모네는 "내가 화가가 된 것은 모두 외젠 부댕 덕분이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미술사에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기게 한 작품이 바로 모네의 '해돋이, 인상'이다. 이제 막 떠오르는 옹플뢰르와 르아브르 앞바다를 그린 이 작품은 전혀 사실적이지 못하지만 태양이 물드는 바다가 강렬하게 뇌리를 파고든다. 이 그림은 1874년 작은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비평가 르루아는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는 비평문에서 "인상? 확실하다. 나는 정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 인상적인 것은 틀림없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안일하게 그리다 만 수준이다. 초벌로 그린 벽지도 이 바다 그림보다는 낫다"라고 악평했다. 다소 경멸적 비판이었지만 '인상주의'와 '인상주의자'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20세기 현대 미술을 싹 틔우고 발전시킨 인상파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인상파는 빛과 순간의 움직임을 자신의 느낌으로 포착하려 했다. 카메라가 발명되어 사진이 사실주의 그림을 대신하게 된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카메라가 표현하지 못하는 예술가만의 인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의미와 역할을 자문할 수밖에 없는 요즘, 새삼 반추해볼 만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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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
천천히 구 항구 부둣가를 따라 걸었다. 파란 하늘이 녹아든 잔잔한 물 위의 요트와 주위를 둘러싼 알록달록한 건물들, 한가로이 길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노르망디의 진주'로 불리는 도시답게 햇빛도 찬란하였다. 지붕의 촘촘한 집들이 물 위에 투영되어 일렁였다. 간지러운 햇살을 받으며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구비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포석이 깔린 골목 양쪽으로 노르망디식 건물이 골조를 드러낸 채 촘촘히 어깨동무하고 있었다. 희한한 레스토랑, 아름다운 가게들, 매혹적인 호텔들, 예술적인 기념품들, 특별할 게 없는 하나하나가 모두 특별해 보이는 도시가 옹플뢰르이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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