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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완의 디자인 생각] 독립출판이라는 '작은 돌'…장르 다양성 기여하는 1~2인 규모 독립출판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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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제법 익숙하거나 한 번쯤 들어봤을 단어다. 독립출판은 독립영화나 독립음악처럼, 기존 방식과는 '다른' 창작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이때 늘 따라붙는 질문이 있는데,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냐 하는 것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 구조가 기존 상업 출판과 무엇이 다르냐는 지적도 있지만, 창작 행위가 꼭 가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출판도 수요와 공급의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출판업자와 창작자에게도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하다.

비제도권 성격의 독립출판…'저자=발행인' 다수
고정비 적게 들어 책 퀄리티에 투자할 여력 커
창작자 본인의 색깔 뚜렷이 드러낼 수 있어
독자층 좁고 선명하며 초판 소량 제작 가능
독자들 독립출판 대한 시선 또한 제법 긍정적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독립출판의 몇 가지 특징을 적어본다. 첫째, 소규모다. 대구에서 사진책을 펴내는 '마르시안 스토리' '사월의눈', 만화책을 발행하는 '블랙퍼스트클럽프레스' 등은 1~2명이 운영하는 작은 출판사다. 규모는 출판기획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인건비 등 고정비용이 적게 드는 만큼 책의 물성에 투자할 여력이 생긴다. 그리고 상업출판에서 다루기 힘든 장르나 주제에 접근하는 기민함을 보여준다. 결정 과정이 복잡하지 않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일이 적다. 아플 정도로 동시대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은 독립출판의 장점이다. 이런 점에서 독립출판이라는 말 대신에 소규모 출판, 1인 출판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둘째, 독립출판은 저자가 곧 출판사 발행인인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속사정이야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창작자 본인의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전략이 되기도 한다. 교동에서 독립서점 '고스트북스'를 운영하는 류은지·김인철 작가는 같은 이름의 출판사를 만들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책을 발행한다. 이런 면에서 독립출판에는 자주(自主)출판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한다. 셋째, 독립출판은 독자층이 좁고 선명하다. 가능하면 많은 대중 독자를 상대해야 하는 기성 출판과 달리 독립출판은 '주변'과 '부분'을 파고든다. 많이 팔리지 않지만, 꼭 만들어야 할 책이 있다면, 초판을 100부 정도 찍어서 소수의 독자를 만나는 것이다. 이때 출판사와 독자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독립출판은 비제도권 출판의 성격을 가진다. 독립출판을 기획하고 만드는 이들은 대체로 용감하다. 완숙함보다는 형식의 신선함을 보여준다.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책이라는 매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만들어지는 의외성이 책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열어주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여러 약점 중에서 애써 찾아낸 장점이다) 독립출판이 혼자서 고독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보다 협업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기획·편집·디자인·제작·유통하는 일련의 과정은 절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독립출판 현상은 창작자들의 에너지 못지않게 인쇄·제작·유통 환경의 변화로부터 기인한 면이 크다. 편집 디자인 소프트웨어의 보편화와 디지털 인쇄의 등장으로 소량 출판 제작이 가능해졌다. 독립출판 특성상 제작 단가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책값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 또한 제법 관대해졌다. 독자들은 책의 내용 못지않게 디자인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작가의 책도 리커버판(동일한 내용의 책이지만 표지를 새롭게 바꾼 책)이 나오면 또다시 구매해서 소장한다. 무엇보다 작은 책방, 동네 책방이 많아지는 것이 힘이 되었다. 작은 책방은 많은 책을 다룰 수 없다.

책방 주인은 신중하게 책을 선별해서 공간의 개성을 구축해간다. 시(詩)를 다루는 책방 '시인보호구역', SF를 다루는 책방, 비건과 기후위기를 다루는 책방 '책빵 고스란히', 페미니즘 이슈가 돋보이는 '책방 이층', 사진책을 다루는 책방 '낫온리북스' 등 독립출판의 기민하고 다양한 주제를 수용하는 장소들이다. 책방도 큐레이션이 중요해졌다. 또 온라인 플랫폼 덕분에 적은 예산으로도 공격적인 마케팅이 가능해졌다. 예전 같으면 신문이나 잡지, 방송에 광고를 내보내는 것이 유일한 홍보 방법이었는데, 지금은 SNS, 유튜브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개인과 개인을 연결해준다. SNS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만큼 홍보 한계가 명확하게 존재하지만, 독자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수월해진 것만은 무시할 수 없다.

독립출판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독립출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상황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해보면 젊고 생동감 있는 출판 현장임에는 틀림없다. 기존 출판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대범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출판에 잔뼈가 굵은 기획자들은 독립출판을 아마추어의 연습장 정도로 치부하곤 했다. 그들의 조소 어린 냉혹한 평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시작이 독립적이고 소규모가 아닌 출판이 있었던가. 1970년대, 서울 종로의 한 골목, 이제 막 시작하는 출판사는 조그마한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두고 앉아있는 대표이자 기획자이자 편집자 한 명, 하루 종일 거래처 서점에 외근을 다니는 영업자 한 명 정도가 전부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그들이 기획하는 책은 세상을 예리하게 관통하는 날 선 책들이었다. 그 와중에 돈을 벌어야 했고 출판사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했다. 현재 수백억 매출을 올리고 수백 명의 직원이 일하는 한국 출판사들의 첫 시작은 말하자면 독립출판이었다. 그러니 출판의 모든 것을 두루 경험한 관록 있는 기획 편집자들에게 지금의 독립출판 현장은 유별난 것이 아니었으리라. 서툰 기획과 편집으로 만들어진 출판물에 대한 그들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시작은 그렇게 작고 가볍고 어설프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독립출판이라는 현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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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면 열리는 '북 페어'가 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 Unlimited Edition'은 올해 14회를 맞이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북 페어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작업해온 독립출판 창작자와 출판사가 참여해서 책과 굿즈를 뽐낸다. 다양한 이벤트와 토크, 사인회, 강연이 함께 열리며 지금의 한국 독립출판 생태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다. 도서정가제 이슈로 인해 서울국제도서전이 다소 위축되었던 분위기와 달리 젊은 독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언리미티드 에디션 열기는 놀라웠다. 행사의 아카이빙은 우리의 독립출판과 아트북에 대한 사(史)적 자료의 기능을 할 것이고, 출판 담론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비평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대구에서도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아마도 생산적 활동'이 열리는데 독립서점 더폴락이 주관하는 북 페어다. 적은 예산에 소박한 규모로 열리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전국의 독립출판 창작자들이 모여서 우정 어린 응원과 자극을 주고받는 귀한 자리이다.

독립출판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책과 출판인이 실체를 드러낸 현장이다. 우리는 출판사의 시작(첫 책)과 성장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중이다. '유유출판사' ' 다' '쪽프레스' '브로드컬리' 등 매력적인 콘텐츠와 마케팅 전략으로 승부하는 작은 출판사를 목격하면서 출판도 브랜딩이 중요해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독립출판을 특별한 장르로 규정하지 말고 출판의 변화무쌍한 모습 중 하나라고 바라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규모로 평가하지 말고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독립출판은 결국 출판 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리병에 큰 돌을 담으면 빈틈이 많이 생긴다. 그 빈틈에 작은 돌이 들어가 박히면 어느새 병은 가득 채워진다. 독립출판은 작은 돌이다. 큰 돌과 작은 돌 모두 소중하다. 우리의 책 문화에는 큰 돌만 있지 않고 작은 돌도 있다. 동네 책방에서, SNS에서 그리고 북 페어에서 용기 있게 작은 돌을 굴리고 있는 출판인들을 만나보시기 바란다.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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