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40609010001025

영남일보TV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11> 5·16혁명과 기업인들

2024-06-14

5·16군사정부 기업인 부정축재 조사…첫 타깃은 삼성물산 이병철

2024060901000243000010251
5·16 혁명 직후 박정희 대통령(당시 육군소장·앞줄 왼쪽 둘째).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느닷없는 정변 소식

1961년 5월16일 아침 7시. 이병철은 일본 경제인들과 골프를 치기 위해 도쿄의 오쿠라 호텔 현관에서 승용차에 올랐다. 일본인 운전기사 구와바라가 근심 어린 얼굴로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느닷없는 정변 소식이었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냥 골프장으로 달렸다. 5·16 혁명정부는 혁명 공약으로 경제인 13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한다고 발표했다. 그 첫 번째가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은 도쿄에 체류 중이었으므로 일단 구속은 면했다. 곧 혁명정부는 도쿄로 두 사람을 보내 이병철의 귀국을 채근했다.

당시 5·16 혁명정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특별 재판소를 설치하고,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회는 부정 축재자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30만달러 이상의 은행보유 외환을 대부받거나 매수한 자, 은행 돈을 융자받아 1억환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 외자구매 외환 또는 그 구매 외자의 배정을 독점함으로써 2억환 이상의 이득을 취한 자, 2만달러 이상의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킨 자, 국영은행 주식을 부당하게 불하받은 자, 과거 5년간 1천만환 이상을 탈세한 자였다. 그 결과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사람은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을 대리한 조홍제, 삼호방직사장 정재호, 대한양회사장 이정림, 대한전선사장 설경동, 동양시멘트사장 이양구, 극동해운사장 남궁연, 대한제분사장 이한원, 동립산업사장 함창희, 한국유리사장 최태섭, 중앙산업사장 조성철, 조선견직사장 김지태, 금성방직사장 홍재선, 화신산업사장 박흥식 등 총 13명이 체포되었다.

도쿄 체류 이병철 대신 조홍제 체포
시종일관 "모든 것 내가 했다" 진술
한달에 걸친 조사에도 혐의 못 찾아

삼성 6개 계열사 추징금 59억환 부과
제일제당 밤샘 생산·판매 벌금 완납

이병철 귀국후 중앙정보부서 데려가
박정희에 "기업인 잘 활용하시라" 건의
구속 3일 만에 메트로호텔서 풀려나

2024060901000243000010253
1961년 11월 일본 이케다 하야토(오른쪽) 총리와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한 달에 걸친 조사

부정축재위원회는 결국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기업인들의 부정축재를 조사했으나 혐의를 찾아낼 수 없었다. 삼성물산이 첫 번째 타깃이었다. 그해 9월 부정축재위원회가 조사한 내용은 검찰로 넘겨져 재판이 열렸고 한국의 기업 50여 개사에 대하여 추징금 200억원이 부과됐다. 삼성그룹의 경우도 6개 계열사에 59억환의 추징금이 부과되었다. 그중 제일제당 앞으로 나온 벌금은 57억5천만환이었다. 당시 혁명재판소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재판정에 출두한 사람들은 대부분 겁을 먹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재판부의 말 한마디에 운명이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사장 조홍제는 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내가 했다. 모든 것은 내 책임하에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조홍제는 결국 풀려났다. 그때 조홍제는 제일제당의 이익금만 가지고는 도저히 벌금을 갚을 수 없자 제일제당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현금을 원맥 도입용 달러 구입으로 돌렸다. 당시에는 달러로만 원맥을 낙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원맥을 확보한 후 제당공장의 인원을 늘려서 일요일도 쉬지 않고 완전 가동에 들어갔다. 밀가루를 밤새도록 생산·판매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거기서 벌어들인 돈으로 달러를 사들여 다시 원맥을 구입, 그것을 제분으로 만들어 회전속도를 최대한 높였다.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금으로 1962년 5월 초, 벌금의 제1차 분납금 17억환을 납입했고 이어 7월 말까지 전액을 완납했다. 이렇게 해서 제일제당에 부과된 벌금 57억5천만환을 모두 갚게 된다.

삼성물산부사장조홍제
삼성물산 부사장 시절 조홍제(가운데). <효성그룹 제공>

◆이병철의 귀국

5·16 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 6월24일 오전 10시 이병철은 오쿠라 호텔에서 "빈곤퇴치를 위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 귀국하는 대로 이에 필요한 절차를 밟고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겠다"라고 AP, UPI 등 외신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날 밤 이병철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초여름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중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의 지프차에 동승,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명동의 메트로 호텔이었다. 그는 거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다음 날 아침 이병철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실에서 박정희와 대면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안 되셨습니까?" 뜻밖에 박정희 부의장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부정축재자 열세 명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정축재자 열세 명은 별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병철이 답하자 박정희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세금포탈이나 미국 원조금 착복 등 경영상의 문제가 있어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1위 기업부터 13위 기업까지 그 기업가를 잡아들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분히 인기 위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당시 혁명정부의 허점을 찌른 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박정희가 되물었다. "기업인의 본분은 기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마련하고 세금을 내고 확대투자를 해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기업인을 양성하려면 적어도 20~30년이 걸립니다. 기업인을 잘 활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텐데…"라고 박정희가 말했다. "국가발전에 필요하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병철의 말이다. 긴장 속에 오랜 침묵이 흘렀다. 이병철은 구속된 지 3일 만에 메트로 호텔에서 풀려났다.

결국 삼성은 "정부의 요구가 무리가 있더라도 따르도록 한다. 해방 후 오늘날까지 매점매석, 귀속재산 불하, 정치권력과 결탁 등으로 졸부가 된 사람도 있고, 은행 돈으로 손쉽게 사업가가 되어 기업은 파산 직전에 있으면서도 애국적인 기업가인 척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횡재 기업가와는 달리 경제성과 경쟁력을 근간으로 기업을 일으키고 운영해왔다. 지금과 같은 혼란에 쉽게 동요하여 우리가 지켜온 큰 것까지 잃게 된다면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방문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11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일본의 이케다 총리를 만났다. 나라의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정부가 가진 돈이 너무 없었다. 일본 정부의 원조를 요청했다. 이케다 총리가 어느 정도의 액수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17억달러 정도의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케다 총리는 깜짝 놀랐다. 당시 일본의 외환 보유고가 17억달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야 국회의원들이나 일본 국민에게 그렇게 큰 액수의 돈을 일본 정부가 주어야 하는지 동의를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에게 일본어로 메이지유신의 지사인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름을 거론했다. "충분히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메이지 유신의 초석이 된 다카스기 신사쿠와 같은 마음으로 한국 정치에 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가진 자금이 너무 없습니다."

2024060901000243000010252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다카스기 신사쿠(1839~1867)는 일본의 무사로서 에도막부 말기 조슈번에서 성장, 기병대를 창설하고, 후배인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유력한 번들을 규합, 에도 막부를 타도하려던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꿈을 펼치지 못하고 1868년 메이지유신 1년 전에 29세의 나이로 사망한 비운의 인물이다. 메이지 유신은 사실 다카스기 신사쿠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재계는 놀랐다. 박정희가 일본육사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일본 역사에 관해 박학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일본 정·재계는 단숨에 한국을 지원하려는 분위기로 기울었다. 이렇게 해서 훗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유무상 차관 7억달러를 받게 된다. 작가·전경련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