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
환자 소외된 의정갈등에도
올림픽 10연패 양궁팀과
맹활약한 메달리스트 보면
우린 생각보다 잘하고 있어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
캐나다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곳으로 긴 휴가를 떠난다. 새스커툰에서도 퇴임하거나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멕시코나 미국의 애리조나, 플로리다 등에 겨울집을 사두고 몇 달씩 지내다 오는 경우가 많다. 80대의 부부 J와 S도 그러한데, 낯선 곳에서 몇 달씩 생활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했더니 친구나 지인들이 비슷한 동네에 많이 모여 살아서 괜찮다고 했다. 아하, 막상 가 보면 거기에 또 새로운 커뮤니티가 생기고 다 살게 되어 있구나.
그런데 어쩌다 나는 추운 겨울은 캐나다에서, 더운 여름은 대구에서 보내는 신세라, 밤에도 30℃가 넘는다는 열대야에 "요즘 날씨 대단하죠?"란 안부가 자연스러운 여름을 보내다 보니, 불과 몇 달 전 영하 30~40℃의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마치 전생처럼 아스라하다. 특히 힘든 건 북미에 비해 높은 한국의 습도가 주는 24시간 끈적임이란 감각과 그로 인한 불쾌감. 80대의 아빠와 함께 지내니 그야말로 삼시 세끼 오늘 뭐 먹지 끼니거리 해결이 하루의 주된 일과이고, 승진심사관련 중요한 대학 업무도 몇주째 작업 중이라 더 더웠던 7월. 한국에선 내 작업공간이 없는데 카페는 소음 때문에, 요즘 대세라는 스터디 카페는 랩톱존은 제한된 좌석뿐이라는데 비용 지불하고 등록하지 않으면 살펴보러 들어갈 수조차 없는 시스템이라 포기.
마감일 앞두고 예민해지는 시기, 진도는 더디고 짜증이 쌓이던 지난 주 어느 날. 그냥 랩톱넣은 배낭 메고 땡볕 아래 땀 흘리며 걸어 동네 카페에 가서 밤 10시 영업종료때까지 일하기 시작했다. 막상 시작하니 몰입이 되고 몰입되니 음악이나 대화 기계소리 등 소음도 영향이 없더라. 널찍한 공간과 트인 전망이 감사하고 타죽을 것처럼 더워 보이던 날씨도 막상 나가서 걸으니 바람도 살랑, 시원하고 땀 흘리며 운동한다는 느낌도 생각보다 상쾌했다. 끼니를 걸러가며 하루 종일 일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길의 뿌듯함은 덤. 아시아와는 다른 방식으로 경쟁이 치열한 북미의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나의 직장생활도 질곡이 있었다. 승진심사 파일 준비를 막상 시작하니 생각보다 그간 내가 이룬 업적이 많고, 여름 휴가기간 급하게 시간을 내서 피드백을 주고, 밤늦게 시간 내서 추천서를 써주고, 확인증을 보내주고, 누락된 자료를 찾아 보내주는 여러 동료들의 도움에,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들과 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하고 있었구나란 자각에 마음이 말랑해진다.
매일 정쟁만 일삼는 정치권, 끝이 보이지 않는 힘의 대립에 환자들만 소외되는 듯한 의료계, '지방'은 곧 사라질 듯한 극한의 지역 간 불균형 등, 뉴스를 보면 대구란 도시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도 미래가 없는 듯 보여도, 올림픽 10연패란 위업을 달성한 한국 여자 양궁팀과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을 비롯, 우리가 생각보다 잘하고 있는 것들이 훨씬 많다. 대구 교육청 교사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한국인 영어교사, 원어민 영어교사 등 대구의 선생님들 그리고 시대와 안맞는 야근을 불사하며 그 선생님들을 위해 일하는 대구의 교육공무원들도 그러했다. 막상 해보니 세계 1등이란 장벽이 생각보다 쉬웠을 올림픽메달리스트들처럼, 좋은 교사도 의사도 없는 것 같은 지방에서도, 우리는 생각보다 잘하고 있다.
신현정 캐나다 사스카추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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