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종규 작 |
케이크가 잠시 모자를 벗고 목운동을 했다. 챙이 넓은 모자는 온갖 과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초콜릿케이크가 이따금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그때마다 면사포처럼 머리를 덮은 슈가파우더가 우수수 떨어져 날렸다. 치즈 케이크가 우아한 손짓으로 공중의 설탕 가루를 흐트러뜨렸다. 잡티 없이 매끈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연은 그들을 보며 다시금 위축되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케이크가 아름답고, 신선하고, 맛있어 보였다.
그때, 쇼윈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연은 그림자의 주인이 좀전의 행인임을 알아보았다. 행인은 진열장 안을 유심히 살피더니, 이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무지개 케이크를 구매했다. 연은 <무지개 3027호>가 정성스레 포장되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순 색소뿐인 케이크가 뭐가 좋다고."
그 말에 연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생크림 케이크가 비아냥과 함께 콧방귀를 뀌는 중이었다.
"맞아. 저런 겉멋만 든 케이크, 한 조각만 먹어도 질리지." 치즈 케이크가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어차피 우리 모두 폐기일 전에 팔려나갈 텐데 뭘 그리 조급해해요?"
초콜릿케이크가 핀잔을 던지자, 생크림과 치즈는 주름이 잡히도록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은 줄이 패인 자리마다 크림을 바르고 다시금 여유로운 표정을 내보였다.
"혹시 모를 일이니까… 너야 팔려 갈 자신이 있겠지. 초콜릿은 기념일마다 많이들 찾잖아. 아무리 볼품없는 초코케이크라도 밸런타인데이 때 하트 장식 하나만 올려놓으면 바로 팔려나갈걸?"
생크림의 대꾸에 초콜릿은 자존심이 상한 듯 고개를 돌렸고, 그 바람에 연과 눈이 마주쳤다.
"까무스름한 걸 보니 그쪽도 초콜릿케이크인가요? 새로운 친척이 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연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상대도 뒤늦게 그의 이름표를 발견하고 짧은 탄성을 뱉어냈다.
"연회장의 딸 1호? 처음 들어보네요." 초콜릿의 시선이 연의 얼굴에 가닿았다. 훑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초면에 실례지만,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요. 다른 일 하다 오셨나요?"
"네, 이전까진 제과 시험을 준비했어요."
연은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래도 3년이나 준비했다니 대단하시다." 실패담을 듣던 치즈가 끼어들었다. "전 1년 만에 접었거든요."
"그럼 두 번이나 기회가 남은 건데, 한 번 더 도전해보시지." 연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도전이라, 좋죠." 치즈가 손에 메이플 시럽을 바르며 응수했다. "그런데 실패하면 끝이잖아요."
연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온몸이 굳은 듯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조차 없었다. 치즈는 손등을 맞비비며 말을 이어갔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3년을 통으로 날린 게 되어버리는데, 그 뒤에 뭘 할 수 있겠어요? 오래된 케이크를 누가 사 간다고. 그럴 바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만두고 안정적인 길을 걸어가야죠. 케이크로 팔려 간다는 게, 요즘은 워낙 경쟁이 치열해지긴 했지만요. 그래도 일단 팔리는 데 성공하면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좋아요?"
치즈는 연의 표정을 살피고 황급히 말을 끝맺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솔직한 성격이라. 연 씨를 비난하는 말은 아니었어요."
연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생크림이 손부채질을 하며 툴툴거렸다.
"더워 죽겠는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힘을 빼? 손님들도 시끄러운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마침 한 손님이 가게로 들어오면서 대화는 중단되었다. 케이크들은 손님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초조함을 들켰다간 손님들에게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케이크처럼 비춰질 터였다.
손님은 고민하며 시식용 케이크 한 점을 삼켰다. 연은 그제야 자기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상기해냈다. 잠시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올까 고심했으나, 자칫 빅사이즈로 보일까 우려되었다. 디저트는 작고 비쌀수록 맛있다는 게 정설이었다. 가족끼리 모여 나눠 먹는 이미지를 내세우는 케이크가 아니라면 몸집을 불려 좋을 게 없었다.
이를 입증하듯 손님은 조그만 컵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친 다음, 연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떠나버렸다. 그 뒤로도 수많은 고객이 오갔으나 마찬가지였다. 연은 점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참을 망설이다 쭈뼛쭈뼛 진열장에서 내려왔다.
"마감 시간까진 한참 남았는데." 카운터를 보던 리에가 시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래된 케이크를 누가 사 가겠어요, 연은 치즈의 말을 무심코 뱉을 뻔했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을 거예요.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다른 방법을 찾아볼래요."
"이미 제과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지나치게 시간을 낭비했으면서? 이제 와서 다른 길을 가기엔 늦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넌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왔어. 여기 있는 케이크들보다 훨씬 뒤처진 상태라는 뜻이지. 지금 네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도 부족할 판에 딴생각을 하는 거냐? 진열장에 들어간 지 겨우 반나절이다. 다들 하루 이틀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는데, 너만 불만이 가득하구나. 그 정도 근성도 없는 케이크를 누가 사 가겠냐?"
연은 두 뺨이 홧홧했다. 양 볼의 크림이 녹아버릴 듯한 열기였다. 그는 코와 눈까지 화끈거리기 시작하여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내내 리에의 말을 곱씹었다. 그때마다 울컥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몇 번이고 제과점으로 돌아가 분풀이를 할 뻔했다. 그는 리에의 가게를 지탱하는 기둥을 몽땅 이빨로 갉아 무너트리는 상상을 펼쳤고, 판매대의 케이크들을 거리로 던져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으며, 리에를 갈라 그 안이 케이크인지 확인하는 계획을 세웠다. 리에가 가진 모든 걸 먹어 치우는 망상을 거스르며 집에 도착했고, 곧바로 실은 스스로에게 가장 화가 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척 배가 고팠다.
우편함을 뒤지며 첫 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손가락 끝에 종이의 감촉이 닿았다. 폐기 일자 통지서였다.
그날 연은 입에 물도 대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리에의 가게로 달려갔다.
*
"내일이 폐기일이에요."
연이 우울하게 고했다. 내뱉은 한숨에 상한 과일 같은 시큼한 향이 묻어났다. 며칠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온몸의 크림이 발끝으로 추락하는 듯한 공복감이 몰려왔다.
"오늘은 휴일이니 손님이 많을 거다."
붓을 쥔 리에의 손이 연의 얼굴 위를 능숙하게 오갔다. 창백한 두 뺨에 색소를 덧칠하고 눈꺼풀에 금가루를 붙이는 손길이었다. 마무리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과일을 주렁주렁 얹어댔다.
데코를 끝낸 연은 마음을 졸이며 진열장 안에서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무지개 3028호>가 출근해 그의 연에 앉았다. 그 케이크는 한 조각이 빈 외형이었는데, 겉면의 단조로운 하얀 아이싱과 대비되는 형형색색의 내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신입 제과사가 무지개 조각을 한입 크기로 잘라 시식용 접시에 올려놓았다.
연은 자기도 단면을 보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리에와 상의했다. 결국, 연은 손가락과 발가락 말단을 잘라 안쪽을 내보이기로 결정했다.
"요즘 오징어먹물이 유행이니 까만 크림이 유리할 수도 있겠다." 리에가 얼룩말 같은 연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잘라낸 부분은 잘 보관해두었다 팔릴 때 같이 넣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정오가 되어서도 연은 팔리지 않았다. 잠시 선잠에 들었다 얼굴 표면이 버석하게 갈라지는 악몽에 놀라 화들짝 깨어났다. 쇼윈도 창에 얼굴을 비춰보니 균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갓 나온 케이크들에 비하면 푸석하게 마른 상태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조바심이 나 아이싱을 두텁게 펴 발랐다.
리에도 마찬가지로 안달복달하며 가게가 한적해질 때마다 연을 찾아왔다. 그는 연의 잘린 단면에 과일 절임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연은 점점 편의점 샌드위치처럼, 보이는 부분에만 속 재료가 가득한 모습이 되어갔다.
연은 몸이 무거워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었으나, 들려오는 초침 소리에 허리를 곤두세우고 유리장 너머 행인들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석양이 뉘엿뉘엿 저무는 거리는 홍차에 빠져 용해되는 한 덩이의 잼처럼 보였다. 때 이른 가로등 불이 켜지고 하얀 달이 건너편 상가 건물에 걸터앉았다. 저 가로등은 케이크일 테다, 연은 생각했다. 보도블록도, 가로수도, 건축물도, 자동차도, 전부 케이크겠지. 그렇다면 이 거리는 케이크구나. <가로수 길>이라는 이름의 케이크.
그렇다면 달은? 저 멀리 떠오른 달도 케이크일까. 연은 그 감미로운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스름한 기운이 유리창을 관통하며 쏟아졌다. 들이켠 숨이 설탕 가루처럼 달큼했다. 간질간질 차오르는 숨에 작게 기침하고 다시금 거리를 올려다보았다. 퇴근한 직장인이 제과점 앞 노점에서 꼬치를 사 먹고 있었다. 그는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앞니로 끊어내며 빠른 속도로 먹어 치웠다. 빈 꼬치를 버리고 떠나는 그의 입가엔 허연 크림과 빵부스러기가 달라붙은 채였다.
또 한 사람이 지나갔다. 그 행인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걸음을 옮기다 다른 이와 부딪히면서 그대로 잔을 놓쳤다. 바닥에 닿는 순간 볼썽사납게 터져버린 플라스틱 컵 안에서 시나몬 빛깔의 시트가 흘러나왔다. 케이크로 만든 도보가 케이크로 만든 커피를 마셔댔다. 어쩌면, 우리는 오직 케이크만을 삼키는 걸지도 몰라. 연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별안간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즉각 브레이크의 다급하고도 히스테릭한 비명이 이어졌다. 자전거를 탄 학생이 무단횡단을 하다 놀라 휘청였다. 달려오던 자동차는 그의 코앞에서 급정거했고, 자전거 주인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학생은 연신 차주에게 사과하며 자전거를 끌고 겨우 도보에 다다랐다. 그는 곧장 리에의 상점을 향해 다가왔는데, 가게 유리창에 얼굴을 비춰보며 부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학생은 10대의 소녀였다. 교복 치마 차림으로, 2차 성징을 맞이한 몸은 굴곡졌고 입술은 틴트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손바닥에 맺힌 멜론색 크림이 선명했다. 학생은 색맹이 본다면 사람의 혈액이라고 착각할 법한 녹색 피를 손수건으로 닦고 다시금 길을 떠났다.
연은 멀어져가는 자전거를 눈으로 쫓다 문득 이 세상에 사람이 있긴 한 걸까 의문스러워졌다. 꼬치를 먹던 성인 남성도, 손을 다친 어린 여성도 모두 케이크였다. 그는 재차 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도블록, 가로수, 건축물, 자동차, 노점상, 꼬치, 커피, 플라스틱 컵, 자전거, 사람과 케이크와 특수 케이크, 그리고 케이크가 된 물건과 물건이 된 케이크, 사람이 된 케이크와 케이크가 된 사람…. 무지개 케이크 광고를 부착한 트럭이 지나갔다. 케이크가 된 특수 케이크. 현기증이 난 탓에 연은 시선을 돌렸다.
시계를 보니 가게 마감까진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시간은 누군가 포크로 베어먹기라도 하는 듯 눈 깜짝할 새에 뭉텅이째 잘려 나갔다. 달콤하다 못해 아릿한 시간이 사라져가는 게 야속했다.
모녀로 보이는 일행이 가게 앞에 멈춰서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진열장을 찬찬히 살피며 케이크를 골랐다. 연은 눈을 감고 절실히 기도했다. 가게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50여 분, 마지막 기회였다. 성인 여성의 손가락이 연을 가리켰을 때, 그는 거의 까무러칠 뻔했다. 연은 당장이라도 포장용 상자에 들어갈 것처럼 상체를 들먹였다.
"이거 시식해볼 수 있나요?" 손님이 물었다.
연은 한순간 김이 빠졌으나 포기하진 않았다. 시식을 원한다는 건 아직 자신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다. 리에가 연의 손발가락을 접시에 담아왔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릴 수만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할 수 있었다. 손님이 연의 조각을 집어삼켰다.
"괜찮네요."
손님의 말에 일희일비가 갈렸다. 연은 다시금 오븐 속의 케이크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비록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으나 애써 그 모습을 무시했다.
"조금 더 안쪽 단면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보이는 부분만 거창하게 치장하고 안은 텅 빈 케이크가 간혹 있다고 해서요."
낭패다, 연은 무채색의 내부를 떠올렸다. 리에가 제빵 칼을 들고 눈치를 살폈다.
"이 케이크는 바깥쪽 둘레에는 과일을 듬뿍 넣어 풍부한 맛을 내고, 중앙은 크림 본연의 맛에 충실하도록 다른 재료 없이 심플하게 만들었습니다."
리에의 변명에 손님이 침묵했다. 기나긴 정적 속에서 연은 초조하게 여성의 눈치를 살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아이가 신경질을 내며 도리질 쳤다.
"난 이거 싫어."
연은 장식을 과하게 얹어 무너져버린 케이크처럼 주저앉았다. 아이는 완강하게 거부의 뜻을 전하며 치즈 케이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건강에 좋아 보이는데." 손님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치즈 케이크를 계산하고 가게를 빠져나가는 내내 단 한 순간도 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 끝났어요." 연은 닫힌 가게 문을 원망스레 쏘아보며 눈물을 삼켰다.
"더 안쪽을 전시해야겠어. 지금처럼 즉석에서 잘라달라고 하면 큰일이니까."
리에가 연의 다리를 자르고, 그 단면을 과일로 장식했다. 연은 그런 리에를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늦었어요. 밤이 깊었으니 더는 손님이 오지 않을 거예요."
연의 말대로였다. 밤거리를 오가는 행인은 없었고, 건너편의 가게들은 벌써 셔터를 내렸다. 하루만 더 있었다면, 연은 진부한 후회를 했다. 폐기 일자를 하루만 늦출 방법이 없을까? 그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닐 텐데. 어차피 유효기간은 유통기한보다 길지 않은가.
리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곧장 진열장으로 돌아온 그는 연의 이름표를 낚아채곤 주방에서 가져온 이름 판을 건넸다. <오징어섕크림케이크1호>가 적힌 초콜릿 판이었다.
"새 이름이다. 아무래도 <연회장의 딸>은 현대미술전에나 어울리는 제목 같아서."
연은 '생크림'이 '섕크림'으로 표기된 사실을 발견했다. 오리지널 <오징어생크림케이크>는 벌써 100번 대가 생산되는 중이니, 그 이름은 짝퉁인 셈이었다. 일순간 초콜릿 판을 든 두 손이 분노로 뜨겁게 달궈졌으나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을 텐데 괜스레 열을 올릴 필요는 없었다.
"아직 영업하나요?"
별안간 찬 바람이 뺨을 스쳤다. 가게 문이 열리며 바깥바람이 들어온 것이었다. 손님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 들어왔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코를 훌쩍이는 그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생크림 케이크 하나 주세요." 그가 진열장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손님, 지금 남은 게 오징어섕크림케이크 뿐인데 괜찮으세요?" 리에가 싱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오히려 건강해서 좋네요. 어머님 생신이셔서요."
손님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연(오징어섕크림케이크1호)은 환호성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는 다이빙하듯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리에가 잘린 다리와 새로운 초콜릿 명찰을 함께 넣어주었다.
"초는 몇 개나 드릴까요?"
리에는 물음을 건넴과 동시에 연의 원래 이름표를 반으로 뚝 꺾었다. 연은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내렸다.
리에가 능숙한 손길로 포장을 이어갔다. 연은 리본으로 사지가 결박된 채 받침대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속이 부글거려 헛구역질이 불거졌다. 차오른 크림을 삼켜내고 고개를 드니 머리 위로 상자가 천천히 닫혀갔다. 그 닫힌 세계를 마주한 순간, 머릿속에 폭죽이 터졌다.
연은 괴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끊어진 리본이 나풀나풀 추락했다. 그는 자유로운 두 손을 높이 들고 <오징어섕크림케이크1호> 명찰을 부러트렸다. 이름표 안의 체리 잼이 쏟아져 얼굴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놀란 리에와 손님을 지나쳐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 손에 다리를 들고 남은 한쪽 발로 껑충껑충 부지런히도 달렸다. 달리고, 달려도 온통 케이크였다.
케이크로 된 길 위에서 방황하다, 케이크로 지어진 집으로 돌아온 연은 쉰내가 나는 과일을 떼어내고 색소를 씻어냈다. 잿빛이 도는 앙상한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막 꿈속에서 깨어난 듯한 몰골이었다. 극심한 피로와 허기에 그는 양치질을 하다 칫솔을 씹어먹었다. 연이어 비누와 치약, 샴푸, 린스, 세면대, 샤워기, 변기를 먹어치웠다. 크림 거품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며 허공에서 터져댔다. 텅 빈 화장실을 마주하고도 포만감이 들지 않아 온 집안을 헤집었다. 거실의 소파와 TV, 리모컨, 전등, 담요, 방석, 카펫, 블루투스 스피커를 입으로 가져갔다. 부엌의 식기와 조리기구, 식탁, 의자, 전자레인지, 냉장고까지 모조리 갉아 먹었다. 식탁 위의 폐기통지서도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종이가 혀에 달라붙어 녹아갔다.
방 안의 모든 걸 삼키고도 연은 허기가 졌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한쪽 다리를 집어 들고 앞니로 긁어먹었다. 그의 손에는 곧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고, 끝내 한 마디가 사라진 손가락을 질겅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까만 크림까지 샅샅이 핥으며 스스로의 몸을 베어먹었다. 무거운 시트와 크림이 점차 사라져갔다.
어디선가 쿵, 고목이 쓰러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연은 주위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두 눈마저 파내 먹은 지 오래였다. 아마도 환청이었을 그 소음은 뇌리에 선명히 남았지만 얼마 안 가 머리통과 함께 삼켜졌다. 마침내 딱딱한 치아만이 남자 윗니와 아랫니를 부딪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끝없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들은 이내 굶주림을 느꼈다.
〈끝〉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