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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3] '3·8 만세 운동' 이만집 목사…법정서도 "3월8일 독립운동 주도자는 바로 나…나만 벌하라"

2025-03-11

대구광복회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3] 3·8 만세 운동 이만집 목사…법정서도 3월8일 독립운동 주도자는 바로 나…나만 벌하라
대구 중구 인교동 오토바이골목 입구에 설치된 대구 3·1독립운동 발원지 기념탑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가 3월에 소개할 인물은 대구에서 3·8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만집 목사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계획했던 핵심 인물이다. 역사적 사건인 대구 3·8만세운동을 거론할 때 그의 활약상을 빼면 논의 자체가 힘들다.

한학자·교사·목사로 늘 청년·민족 곁
대구YMCA 초대회장으로 운동 구심점

서문시장 1천명 만세운동 벌여 구금
"형벌은 모두 내게 적용하고 부족하면
나의 대대손손까지 복역시키라" 강변

옥고 후엔 교회자치운동하다 제명돼
82년 만인 2005년 뒤늦게 목사직 복권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3] 3·8 만세 운동 이만집 목사…법정서도 3월8일 독립운동 주도자는 바로 나…나만 벌하라
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교남 YMCA회관' 전경. 3·8만세운동 기록물들이 전시돼 있다.

◆ 계성학교 교사에서 대구 3·8 만세운동 주역으로

이만집은 1876년 7월7일 경북 경주군 강동면 호명리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한학자로 꽤 유명했다. 23세때 경주를 찾은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를 만났다. 이때 성경책을 건네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906년 아담스 선교사가 대구에 계성학교를 설립할 때 경주에서 잠깐 만났던 이만집을 한문 교사로 초빙했다. 이때부터 이만집은 대구에서 활동했다.

이만집은 대구에 금세 적응해 지역 교계 중심에 섰다. 1909년 남성정교회(현 대구 제일교회) 장로로 임명되고, 경북을 돌며 전도 활동을 했다. 1912년엔 평양신학교에 입학, 정식 신학 교육을 받았다. 이후 남성정교회를 떠나 남산정교회(현 대구 남산교회)를 설립, 목사가 됐다.

이만집은 늘 청년들 곁에 있었다. 1918년엔 교남기독청년회(교남YMCA·현 대구YMCA)를 조직,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다. 교남YMCA는 당시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들이 다수 활동해 대구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이갑성은 대구로 내려와 이만집을 찾았다. 독립운동 동참을 권유하기 위해서다.

이만집은 심사숙고 후 대구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했다. 3월1일 이갑성이 비밀리에 보낸 독립운동서와 취지서를 입수한 그는 사람을 불러모았다. 같은 교회에서 활동하던 김태련,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 백남채 등과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이만집과 일행은 시위를 3월8일 서문시장에서 열기로 했다. 이후 추가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계성학교·신명여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성경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독려도 했다.

3월8일 오후 2시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이만집은 쌀가마니 위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선창했다. 군중은 1천명까지 불어났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다. 이만집 등 157명이 붙잡혀 구금됐다.

체포된 이만집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만집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자신만 벌하라"는 취지로 판사에게 따졌다.

"법이 한국 독립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적용한다는 조문이 어디 있나? 주모자는 바로 나다. 72명이 받을 형벌을 모두 나에게 적용하고, 부족하면 나의 대대손손까지도 복역시키든지!"

옥고를 치른 뒤 이만집은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선교사가 주도했던 교계 질서를 탈피하기 위해 '교회 자치 운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이만집은 1923년 본인이 속해 있던 경북노회(장로교 대구 노회)에서 제명됐다. 사실상 '목사'직도 잃었다. 이만집은 1944년 6월8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68세에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1999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3] 3·8 만세 운동 이만집 목사…법정서도 3월8일 독립운동 주도자는 바로 나…나만 벌하라

◆후손 "교회에선 언급 기피돼 안타까워"

이만집 목사의 증손자 이선목씨는 현재 인천 한 교회에서 목사로 활동 중이다. 이씨는 "아버지를 통해 증조 할아버지에 대해 들었다. 저도 자녀들에게 증조할아버지의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대구에 종종 내려간다. 기관포 앞에서 만세 시위를 한 그 용기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고 했다.

이만집은 82년 만에 '목사'직을 회복했다. 2005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북노회는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만집 목사가 정작 교회 내부에선 소홀히 다뤄졌다며 목사직에 복권시켰다.

이씨는 이만집 목사가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별다른 언급이 없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대구제일교회 건물이 최근 대구 기독교역사관으로 조성돼 가봤는데,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어요. 그나마 주변에 있는 청라언덕, 교남 YMCA에서는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었죠. 교회에서 만든 게 아니니까요…."

이씨는 이만집 목사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인물'로 기억되길 원했다. 이씨는 "증조 할아버지는 원래 유교 사상을 갖고 있던 한학자였다. 쉽게 기독교인이 된 게 아니었다. 당시 제사를 지내는 등 기독교와 배치되는 사상에 대해 끊임없이 선교사들과 토론했다고 한다. 무엇이 옳은지 항상 고민하고, 행동에 옮긴 분이었다"고 했다.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3] 3·8 만세 운동 이만집 목사…법정서도 3월8일 독립운동 주도자는 바로 나…나만 벌하라
이만집 목사 〈영남일보 DB〉

◆"3·8 만세운동은 민주주의에 큰 의미"

지난 6일 방문한 교남YMCA. 이곳에선 3·8 만세운동 당시 이만집과 YMCA회원들의 활약상이 남겨져 있다. 독립선언서, 태극기, 판결문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3·8 만세운동에 대한 설명도 상세히 적혀있다. 최근 이곳 2층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의 부조가 설치됐다.

서문시장 인근 인교동 오토바이골목 입구에는 만세운동 발원지가 있다. 이만집 목사가 3월8일 쌀가마니 위에 서서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손산문 영남신학대 교수는 "대구 3·8 만세운동은 의미가 크다.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대부분 시위는 다소 '정적'이었다. 이에 반해 3·8 만세운동은 시장에서 결집해 길거리 시위로 이어져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시위였다"며 "특히, 당시 개신교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폭력 없는 시위를 진행해 민주주의 측면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이러한 3·8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만집은 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글·사진=박영민기자 ympark@yeongnam.com
▶독립운동가 선정 자문위원: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김일수 경운대 교수·강윤정 안동대 교수·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우대현 광복회 대구시지부장·변재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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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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