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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시론]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2025-03-12

[영남시론]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지난 5일 대구시가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 일대 818.8만㎡(248만평)에 육군 제2작전사령부를 비롯해 다섯 개의 군부대를 이전시켜 '밀리터리 타운'으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부지 면적은 영남대학교 땅의 3배 정도다. 군위(軍威)의 지명은 '군사의 위엄'을 뜻하는 데서 나왔고, 우보(友保)는 '벗을 보전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전시(戰時)라면 '전우를 보호한다'라는 뜻으로 넓게 해석할 수 있겠다. 봉산리는 '봉황을 닮은 산'의 준말이다. 사실 봉산리는 팔공지맥의 남쪽 끄트머리다. 나지막한 산과 구릉이 주름처럼 겹겹이 접혀 있어 후미지고 으슥하다. 남인 처사들이 은거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우보는 조선시대 의흥현의 속지였으나, 대일항쟁기에 면으로 승격했다. 우보면에는 크고 작은 집성촌이 있는데, 이 중 가장 큰 씨족은 월성박씨 무계공파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무계공 박민수의 후손들이 지금도 우보면 봉산·달산·이화·미성·나호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특히 봉산리에는 내란과 외환에 맞선 충성스러운 두 무장(武將)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바로 무계공의 차남 현감공 낙옹 박응상(1526∼1592)과 7대손 의은 박계우다. 내년이면 공교롭게도 박응상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조선 명종 4년, 23세 때 무과에 급제했다. 이순신 장군보다 19살이 많고, 과거 급제 경력으로는 27년 선배인 셈이다. 사헌부 감찰, 첨사를 거쳐 제주도 대정현감 겸 병마절제도위로 4년간 재직 중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모친상을 당해 고향 원당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른 후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봉산리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67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왜적의 침략에 분기탱천해 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노령에 병색마저 짙어 전장에 출전하지 못함을 탄식하다가 7일간 단식 중 자정순국했다. 구한말 일제에 저항해 자정순국의 길을 연 안동 선비 향산 이만도가 생전 무계공의 재실을 찾아 '영우정(詠雩亭)' 현판을 쓴 건 우연이 아니다. 박응상 장군을 기리는 재실 수각(水閣)이 봉산동에, 유고집인 낙옹실기가 전해 온다.

의은 박계우는 영조 4년(무신년) 이인좌·정희량의 난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거창 우두령 전투 때 관군과 합세해 정희량을 생포한 공로가 컸지만,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은거했다. 재실인 덕산재(德山齋)와 의은유집이 남아 있다.

애국애족의 길을 걸은 두 무인은 이 시대 진정한 충(忠)이 무엇인가를 생각게 한다. 중국의 사상가 묵자는 "국익(國益)을 위해서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르면 그르다고 말해야 하며, 잘못을 감시하고 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충(忠)이라고 했다. 즉 진정한 충은 부당한 처사에 불복하고, 비합리적 명령에 항거하는 정신을 포함한다. 과거 봉건적 신민(臣民)의 시대에도, 시민이 주체인 지금 시대에도 충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당시 상관의 불의한 명령을 거부한 조성현·권영환·윤비나 대령은 참군인의 전범(典範)이 무엇인지 잘 말해준다. 절체절명의 시기 자신의 직과 목숨을 걸고 아니라고 한 영관 장교의 판단과 결의는 높이 본받을 만하다.

되돌아가 향후 군부대가 군위군 우보면 봉산리로 이전하게 된다면 박응상과 박계우 장군의 유허지에 정훈교육관을 건립하면 좋겠다. 부득불 재실을 이건하더라도 두 무장의 비석만큼은 보존해 충절 정신을 기려야 할 것이다.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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