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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의 문학 향기] 송상현의 마지막 시

2025-05-23 07:47
정만진 소설가

정만진 소설가

로저 무어가 첩보 영화 '007' 시리즈의 'James Bond'로 출연하고 있을 때 일이다. 하루는 제임스 본드를 실존 인물로 믿는 7살 어린이가 쫓아와 그에게 사인을 해달라며 반겼다. 로저 무어는 'Roger Moore'라고 적어 주었다. 그런데 어린이는 흥겨워하기는커녕 아주 어두운 낯빛을 지었다.


잠시 후 어린이의 할아버지가 와서 말했다. "손자가, 당신이 이름을 잘못 적어주었다면서 아주 실망해 있어요!" 잠깐 생각에 잠겼던 로저 무어가 어린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즉석에서 제임스 본드의 작전 수행 장면을 열렬히 연기했다.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어린이에게 로저 무어가 속삭였다.


"얘야! 나는 'Roger Moore'라고 사인할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James Bond'라고 썼다가는 악당 블로펠드에게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거든. 그렇게 되면 위험에 빠져. 그러니까 너도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줘. 부탁이야!"


어린이는 매우 기뻐했다. 로저 무어는 2017년 5월23일 세상을 떠났다. 1592년 5월23일 우리나라에는 로저 무어의 사례와 정반대되는 일이 일어났다. 부산 앞바다로 왜적 전함들이 몰려들었는데, 그것을 아군은 매년 쌀을 실어가려고 오는 세견선으로 여겼다.


그 이튿날 1만8천여 왜군은 민간인을 합쳐 겨우 1천여 명이 저항하는 부산진성을 공격해 첨사 정발부터 부녀자까지 모두의 생명을 앗았다. 다시 그 이튿날 왜군은 동래읍성으로 쳐들어왔다. 부산진성과 마찬가지로 동래읍성 역시 무기와 군대 규모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그날 바로 무너졌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적 대군이 밀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부채 위에 시를 썼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이었다.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었지만/ 이웃 군대의 지원 기척은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아버지의 은혜는 가벼이 하오리다".


놀라운 일은, 송상현 순국 일곱 달 후에도 임금 선조가 그의 절멸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선조실록' 1592년 11월25일자는 송상현이 항복해 왜장으로 활동한다는 소문마저 떠돌았음을 증언한다.


로저 무어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에 반해 임금 선조는 충신을 그토록 홀대했다. 그런데도 송상현은 군신 사이의 의리가 아버지의 은혜보다 무겁다고 했다. 인간세상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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