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웹툰 흥행 이어지며 디지털 콘텐츠 인식 변화
출판계, 오디오북 등 웹콘텐츠도 책 범주 편입

지난 4월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시민이 만화책을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최고시청률 26.9%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원작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웹소설이다. 2017년부터 2018까지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에서 연재됐다. 평범한 직장인이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환생해 복수를 펼친다는 설정은 연재 당시부터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다.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드라마로도 제작되며 이야기의 생명력은 더 길어졌다.
지난 1월 나온 메디컬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도 웹소설이 원작이다. 이를 기반으로 웹툰 작가의 각색이 더해진 동명의 웹툰이 나왔고, 올해 넷플릭스 시리즈물로도 제작됐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의료 사건과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탄탄한 고증과 현실적인 전개로 호평을 받았다. 웹툰은 전 세계 누적 조회수가 4억1천회를 넘기며 글로벌 콘텐츠로 자리매김했다.

웹툰 '중증외상센터: 골든 아워' 표지(왼쪽)와 넷플릭스 시리즈 포스터. <네이버웹툰·넷플릭스 제공>
이처럼 웹툰·웹소설 등 웹콘텐츠 시장이 커지며, 웹콘텐츠를 둘러싼 출판계의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 디지털 연재물은 오락성 소비 콘텐츠에 불과하다는 시선이 많았지만, 수년 전부터 단행본 출간, 드라마·영화·게임 등 2차 콘텐츠 제작에 성공하면서 출판계 역시 이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최근엔 오디오북 같은 청각 중심의 책 역시 하나의 출판물로 인정받고 있다. 출판의 개념이 종이책 중심에서 디지털 콘텐츠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2021년부터 매년 발간하는 연간 '출판시장 통계'에 웹툰·웹소설 플랫폼 기업을 포함시켰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리디, 디앤씨미디어, 레진엔터테인먼트 등 굵직한 웹소설 출판사와 전자책 플랫폼이 대거 들어갔다. 출판계가 전자책뿐 아니라 웹콘텐츠도 책으로 편입시킨 것. 한 출판계 관계자는 "출판의 본질은 결국 '스토리'에 있다. 이야기를 기획하고 편집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현재, 디지털 형식으로 유통되는 콘텐츠 역시 출판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어떤 형태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출판의 범주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웹콘텐츠 시장 성장세…매출액 22.1% 증가

스타일 커머스 플랫폼 에이블리가 지난해 만화 출판사들과 손잡고 시작한 웹툰·웹소설 서비스. 최근 학산문화사도 입점했다. <에이블리 제공>
지난 4월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가 발표한 '2024년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만화·웹툰·웹소설 출판사(8개사)의 매출액 합계는 약 2천635억원으로 전년 대비 22.1% 증가했다. 영업이익 합계는 약 123억원으로 같은 기간 385.9% 늘었다. 국내 주요 출판사 71곳의 총 매출액이 4조8천911억원으로 전년보다 0.1%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전통 출판시장 전반이 정체기를 겪는 가운데 웹콘텐츠 시장은 뚜렷한 성장을 보인 것이다.
이런 흐름에 맞춰 최근 출판시장은 전통적 일반 도서에서 웹툰·웹소설 등 웹콘텐츠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박영길 대구출판산업지원센터 센터장은 "예전에는 원고를 받아 기획·편집·디자인을 거쳐 책으로 출간하고 유통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가 등장하며 출판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다"며 "기업이나 작가들을 만나보면 전통적인 출판에는 관심이 없고, 처음부터 웹 기반 출판을 염두에 두는 분들도 있다"고 전했다.

KT밀리의서재 '밀리 스토리'의 웹소설 서비스.
대표적으로 독서 플랫폼 KT밀리의서재는 2025년을 독서 '종합' 플랫폼 도약의 원년으로 삼고, 웹콘텐츠로 사업을 대폭 확장한다고 밝혔다. 먼저 '밀리 스토리'를 오픈해 웹소설 서비스를 정식 출시한다. 장르 특성을 반영한 세분화된 카테고리 구성, 이용자 맞춤형 큐레이션, 오디오 콘텐츠와의 연계 기능 등을 통해 이용자 취향과 사용 패턴에 최적화된 몰입감 높은 독서 경험을 전달할 예정이다.
출판업계가 웹콘텐츠에 주목하는 이유는 영상화·굿즈 상품화 등 지식재산권(IP)을 확장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밀리의서재 또한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2차 콘텐츠 제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구르미 그린 달빛' '재벌집 막내아들'과 같은 웹소설이 드라마화에 성공했고, 다른 웹소설들도 가능성을 갖고 있다. 웹툰 역시 마찬가지다. 시각화가 이미 이뤄진 콘텐츠인 만큼 영상화에 유리하고,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해외 진출 가능성도 높아 관련 산업 전반에서 '원천 IP'로 주목받는다.
일반 서적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장르와 서사를 자유롭게 담아내는 점도 성장 요인 중 하나다. 빠른 전개와 강한 주인공은 물론,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보던 소설이나 만화가 영상화까지 되니 독자들 입장에서는 볼거리가 배로 늘어 더욱 즐겁게 콘텐츠를 만끽할 수 있다. 웹소설 독자 김모(여·25)씨는 "자극적이고 몰입감 있는 서사가 끊임없이 이어져 계속 읽게 된다"며 "특히 내가 보는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때는 마치 내가 키운 것처럼 뿌듯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한번 즐길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듣는 콘텐츠' 오디오북, 유명 작가·배우들도 나서 주목

KT는 밀리의서재와 함께 KT AI 보이스 스튜디오의 '아나운서 AI 보이스'로 제작한 오디오북 4종을 공개했다.

독서 플랫폼 윌라에서 독점 공개하는 김영하 작가의 오디오북. <윌라 제공>
또 다른 새로운 출판물로 오디오북도 주목할 만하다. 귀로 즐기는 책은 바쁜 일상 속 틈새 시간 독서에 최적화된 콘텐츠다. 등장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시각장애인을 위한 책으로만 주목받았지만, 이제는 출·퇴근길, 운동 중, 혹은 잠들기 전 등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소리 콘텐츠로 자리잡았다.
최근에는 오디오북 기획에 유명 작가들과 배우들이 직접 나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문학동네작가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한 김영하 작가는 통합 독서 플랫폼 윌라를 통해 지난 21일부터 오디오북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 4월 펴낸 산문집 '단 한 번의 삶'과 2013년 발표한 소설 대표작 '살인자의 기억법' 등이다. 특히 '단 한 번의 삶' 오디오북 낭독에는 배우이자 출판사 무제 대표인 박정민이 참여해 더욱 이목을 집중시킨다.
박정민의 출판사 무제에서 펴낸 책 '첫 여름, 완주'는 한국 출판계에서 제법 새로운 시도다. 종이책에 앞서 오디오북이 먼저 나왔다. 처음부터 '듣는 소설'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눈이 불편한 이들을 먼저 생각하고 만든 책이다. 고민시, 염정아, 최양락, 김의성 등 유명 배우·성우들이 재능 기부로 참여함으로써 의미있는 나눔에 힘을 보태 화제가 됐다. 몰입도 높은 연기뿐만 아니라 풍성한 음향 효과와 장면을 선명하게 그려내는 배경 음악까지 더해져 한 편의 '라디오 드라마'라는 평을 받는다.
스토리텔링의 힘, 종이책 읽기로 이어질까

지난 4월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만화책들이 놓여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2024년 출판시장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만화·웹툰·웹소설 출판사(8개 사)의 매출은 2천635억원으로 전년 대비 22.1% 늘었다. 연합뉴스
업계 일각에서는 디지털 출판물의 확장이 기존 출판 생태계에 일시적인 충격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독서 인구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통적인 종이책 형식을 띠지는 않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서사가 독자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심어준다는 이유에서다. 한 도서관 사서 A씨는 "최근 도서관에 오는 청소년들을 보면 어떤 웹소설이나 웹툰 등을 접한 뒤 유사한 주제의 소설을 찾는 경우가 있다"며 "디지털 출판물이 독서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하지만, 스토리텔링에 대한 흥미를 높여 오히려 책과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대구출판산업지원센터에서도 이를 주목하고 뉴플랫폼 기반 콘텐츠 창작자 발굴과 출판IP 제작 지원에 나서고 있다. 특히 지역 출판사의 기획 역량 강화를 위해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사업'을 통해 출판 콘텐츠 소비를 위한 서비스 플랫폼 개발을 지원한다. 또 직군별 전문교육을 통해 지역 출판산업 역량 강화에 힘쓰고 있다. 지난 5월엔 대구 지역 웹소설 작가 및 플랫폼 종사자와 웹소설에 관심 있는 시민을 위한 '퍼블린팅 트렌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등 세계의 명성 있는 도서전에는 종이책뿐만 아니라 웹소설, 웹툰, 오디오북 등 다양한 출판물이 한자리에 모인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도 디자인, 그림책, 만화·웹툰·웹소설, 학술 도서 총 4개 분야에 걸쳐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을 선정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출판시장 역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아 더 많은 도서전에서 디지털 콘텐츠와 종이책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풍경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