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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년, 경북독립운동가의 길] 10<끝> 美공군 조종사 된 기독교인 독립지사, 정운수

2025-11-30 14:43

만세 부르고 美유학길에서도 독립운동…生 마감 후엔 잊혀지기만

의성에서 태어나 기독교와 함께 성장

대구 계성학교 다니면서 대구만세운동 참여

연희전문 재학 당시 6·10 만세운동 함께

미국 프린스턴대학 유학 중 이승만 등과 인연

미군 입대 후 공군 소위 임관 태평양 전쟁 참전

귀국 후 선거 줄낙선…고향엔 흔적하나 없어

정운수 국가보훈부공훈록 사진.(경북 스토리텔링)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정운수(鄭雲樹, 1903∼1986) : 의성→대구→서울→미국→동남아→중국→서울


경북 의성에 금성산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死火山)이다. 금성산 아래에 경덕왕릉이 있다. 신라 전성기 경덕왕(742∼765년 재위)이 아니라 185년 신라에 복속된 의성 조문국 경덕왕의 무덤이다. 그렇지만 자연유산 금성산도 역사유산 경덕왕릉도 생소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경덕왕릉에서 1.5㎞ 지점에 '문익점 목면 유전비'가 있다. 문익점의 손자인 의성현령 문승로가 재배 기술 습득 및 종자 대량 확보에 힘써 목화 농사의 전국 확대를 이룬 업적을 기려 1909년에 세워졌다. 구한말 의병장 김도화가 문장을 썼다. 하지만 비석도 김도화 의병장도 요즘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의성군 경덕왕릉에서 1.5㎞ 떨어진 곳에 문익점 목면 유전비가 있다. 이 비석이 있는 대추불마을은 제오리로 알려져 있고, 정운수가 태어난 마을이다. 사진은 문익점 목면 유전비.

의성군 경덕왕릉에서 1.5㎞ 떨어진 곳에 문익점 목면 유전비가 있다. 이 비석이 있는 대추불마을은 제오리로 알려져 있고, 정운수가 태어난 마을이다. 사진은 문익점 목면 유전비.

목화비가 있는 동리 이름은 대추불 마을이다. 보통은 제오리로 알려져 있다. 1903년 정운수 독립지사가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연유산 금성산, 역사유산 경덕왕릉, 문화유산 문익점 목면 유전비, 의병장 김도화를 별로 기억하지 못하듯이 사람들은 정운수 지사의 이름도 낯설어 한다. 그 생애를 알면 경탄과 경외심이 샘솟을 인물인데도 말이다.


목화비 오른쪽에서 대추불마을 후미로 난 골목길을 200m쯤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제오교회 창립 1907년 3월 21일 경안노회 100주년위원회'라는 금빛 현판이 외벽에 게시되어 있다. 지금의 예배당은 1978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1907년은 정운수 지사 출생 4년 뒤로, 2025년을 기준으로 삼을 때 118년이나 전이다. 꽤나 까마득하다. 그 머나먼 옛날에 도시는 물론 근교도 아닌 산촌 지역 대추불마을이 교회를 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대추불마을에 자리한 제오교회는 1907년 만들어졌다. 지금의 예배당은 1978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 당시 산촌마을에 교회가 있었다는 것, 부모가 제오교회의 초기 신자였다는 것은  정운수 지사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추불마을에 자리한 제오교회는 1907년 만들어졌다. 지금의 예배당은 1978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 당시 산촌마을에 교회가 있었다는 것, 부모가 제오교회의 초기 신자였다는 것은 정운수 지사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정운수 지사의 부모가 이곳 제오교회의 초기 신자였으리라 짐작해보는 것 또한 경이로운 일이다. 대추불마을에 일찍이 기독교가 전파된 사실이 정운수 지사의 진학 학교 선택, 그리고 이승만과의 인연을 놓은 노둣돌이 됐으리라 여겨지는 까닭이다. 계성학교, 연희전문, 평양신학교, 미국 프린스턴대학 신학과. 모두가 한결 같이 기독교 계열이다.


정운수는 9세이던 1912년 가족을 따라 대구로 나왔다. 16세이던 1919년 계성학교를 다녔다. 3월8일과 10일 대구 만세운동을 계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주도했다. 이때 구속자 76명 중 44명이 계성학교 교사 또는 학생이었다. 정운수는 이때 붙잡히지 않았지만, 공부를 가르쳐주던 교사들과 함께 공부하던 학우들이 수없이 투옥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비로소 정운수는 조문국 경덕왕릉 일대를 마구 휘저으며 놀았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게 됐다. '꽃 피는 철이 오면 계집애들은 호미로 봉분을 긁으면서 봄나물을 캤지. 머슴애들은 겨울철 눈 내린 날 무덤 꼭대기에 올라 환호성을 내지르며 아래로 미끄럼을 탔고….'


"조문국이 망했듯 조선 또한 망했다. 철없는 우리는 경덕왕릉 일원을 함부로 짓밟으며 놀았고, 일제는 지금 우리 삼천리를 제멋대로 유린하고 있다. 이제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조문국 여인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 금성산성을 쌓았듯 우리도 있는 힘을 다해 일제에 맞서야 한다. 스승들과 학우들이 일심동체로 궐기해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있다. 나도 일어서야 한다!"


23세이던 1926년에는 연희전문 학생이었다. 이때도 6·10만세운동에 참여했지만 투옥되지는 않았다. 6월10일 서울 시위 때 체포된 대학생 50명 중 42명이 연희전문 학생이었다. 친한 벗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일을 겪었으니 정운수의 마음에는 그 아픔이 시퍼렇게 새겨졌다. 물론 이때의 경험은 미국 유학 이래 그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1935년 평양신학교를 마친 정운수는 로버트 교장의 추천으로 프린스턴대학 신학과에 진학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는 그해 10월17일자에 정운수의 미국 당도를 보도했다. 기대를 모은 만큼 정운수는 유학 생활 시작부터 바로 동지회 등 여러 애국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벌어졌을 때 정운수는 신한민보에 거듭 글을 올려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특히 3·1절 23주년 기념 한인자유대회 진행 상황을 알린 그의 일곱 차례 보고문은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45년까지 줄곧 그랬지만, 1942년 당시에도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불승인 정책'을 표방했다. 한인대회는 미국 정부에 한국 독립과 임정 승인을 호소하는 데 개최 목적이 있었다. 2월27일부터 3월1일까지 워싱턴에서 열린 이 한인대회는 이승만이 주도했다.


한인대회 개최와 성공을 위해 이승만을 적극 지원한 사람이 바로 정운수였다. 본래 정운수는 도미 직후인 1935년부터 임병직(뒷날 외무장관 역임), 장기영(체신장관 역임) 등과 함께 '주미외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통신'을 편집하고 발송해 이승만을 도왔다. 한인대회가 끝난 뒤 정운수는 이승만의 보좌관에 임명됐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의 미국 한인사회는 매우 고무된 상태였다. 미국인들은 우려, 분노 등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한인들은 미일전쟁 개시를 오직 식민지 한국의 해방으로 간주했다. 미주 한인들은 기꺼이 국방 공채 매입, 국방경위대 창설, 미군 자원 입대 등을 실천했다.


정운수는 강원도 철원 출신 김세선 등과 함께 미국 군대에 들어갔다. 당시 39세였다. 김세선은 40세였다. 다들 전쟁터 신참으로는 지나치게 나이가 많은 고령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20대 초반의 새파란 청년들인 양 신병훈련소에 입소했다.


재미 한인들의 참전은 이승만의 구상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1년 9월 한국인에 대한 군사훈련을 미국 군부에 요청했다. 정운수 등 이승만 지지자들은 그 계획에 찬동해 기꺼이 미군에 자원입대했다.


이윽고 정운수는 1944년 1월 미군 공군 소위로 임관됐고, 그해 5월 CBI(중국-버마-인도) 전투구로 발령이 났다. 1945년 1월에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쿤밍으로 갔다. 근무지가 미군 제14항공대 특수 중폭격기 대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일본 군대와 수시로 전투를 하던 중 충칭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앞둔 미군이 정운수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보낸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정운수는 미국 공군 소령 사젠트와 함께 김구·김규식 등과 상의를 마친 뒤, 양자강 너머 광복군 제1지대와 시안의 제2지대를 방문해 현황을 파악했다. 그 후 미국 전략정보국(OSS) 산하에 한미합작 유격대를 조직해서 훈련시키라는 미국 국방성의 지시에 따라 제2지대 소속원들을 대상으로 통신교육을 실시했다.


태평양전쟁 개전 사흘 뒤인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특정 지역을 파괴 또는 점령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군의 국내 공격은 무산되고 말았다. 정운수의 국내 진입도 실행되지 못했다.


1945년 8월18일 정운수는 중국 주둔 미군이 항복 절차를 밟기 위해 편성한 선발대의 일원이 돼 여의도 비행장 상공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위협에 밀려 중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군 복무를 마친 정운수는 뉴욕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승만의 귀국 종용 편지를 받았지만 거절한 채 공부를 계속해 1949년 학위를 받았다.


정운수는 귀국 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1950년 의성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4위를 기록했다. 당선자도 무소속이었다. 자유당은 이듬해인 1951년에 창당됐다.


정운수는 1954년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유당 소속은 아니었다. 1958년에도 자유당 소속이 아니라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 결과는 3위, 낙선이었다. 당선자는 자유당, 차점자는 민주당이었다.


그는 1960년 총선에도 출마했다. 이때는 4월혁명으로 자유당이 해체된 뒤였던 까닭에 자유당 후보는 애당초 없었다. 당선자는 민주당 후보였다. 정운수는 5위를 기록했다. 정운수가 입후보한 세 번의 총선에서 그를 누른 세 명의 당선자 가운데 독립운동가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정운수 지사가 태어나고 자란 경북 의성군 제오리는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유명하다. 정운수를 기리는 독립지사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져야 마땅하다.

정운수 지사가 태어나고 자란 경북 의성군 제오리는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유명하다. 정운수를 기리는 독립지사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져야 마땅하다.

정운수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고향마을 제오리가 유명해졌다. 300개 이상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1987년 발견됐던 것이다. 우리나라 공룡발자국 중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제오리 공룡발자국화석 산지는 각광을 받았다. 그 공룡발자국 바로 옆에 문익점 기념비가 있다. 정운수 독립지사를 기리는 현창 조형물이 그곳에 세워지면 더욱 금상첨화이리라.


글=정만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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