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지난 한 해 마라톤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골프나 테니스 말고 마라톤에도 그랜드슬램이 있나. 이런 의문을 가진다면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독자시다. 그랜드슬램이란 스포츠에서 특정 선수가 한 시즌 동안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것을 뜻한다. 야구에서 '한 방에 싹쓸이'를 하는 만루 홈런을 말하기도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보스톤, 런던, 베를린, 시카고, 뉴욕, 도쿄 등 6개 대회를 모두 완주하는 것을 마라톤에서는 그랜드슬램이라고 부른다. 프로 선수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대상이 되며, 한 시즌이 아니라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달성하는 기록으로 모두 완주하면 '식스 스타 메달'을 수여한다.
요즘 마라톤 열풍이 불고 있다. 부동산과 주가는 연일 폭등하고 있지만 체감 경기는 한파인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면서,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은 골프나 테니스에서 마라톤으로 대이동이 시작된 듯하다. 달리기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가벼운 복장으로 손쉽게 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5년 국내 마라톤 대회 참가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외국에서나 보던 도심 곳곳을 뛰어다니던 사람들을 이제는 국내에서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당뇨와 고혈압 등 건강상의 이유로 몇 년 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초반에 체중과 나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의욕만 앞선 결과 무릎에 염증이 생겨 고생하기도 했지만, 달리기는 모든 질병의 근본 해결책으로 손꼽히는 체중감소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기록을 갱신할 때마다 느끼는 희열 또한 중독성이 만만치 않다. 바쁜 일상 때문에 며칠이라도 쉬면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이다.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환갑의 나이에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다니 대단하다는 경탄과 칭찬이 쏟아지기 전에 고백하자면, 공식적인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4개의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고 목표로 정한 5㎞ 코스를 달린 것이다. 4개 대회 모두 합쳐도 마라톤 풀코스인 42.195㎞의 절반도 안되는 거리이고, 기록도 형편없지만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을 준 시간들이었다.
지난 2025년 한해 여성신문사와 서울시가 공동주최한 '여성마라톤대회', 서울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과 서울시장애인체육회가 공동주최한 '어울림마라톤대회', 연합뉴스와 춘천시육상연맹이 공동주최하고 ICT기업인 더픽트와 한국스카우트연맹이 공동주관한 '춘천연합마라톤대회', 한국자폐인사랑협회와 서울시가 공동주최한 '오티즘레이스'에 참가하였다.
장황하게 참가대회의 명칭을 기록한 것은 일반적인 마라톤과 다른 성격의 대회임을 알리고자 함이다. 모두 여성, 시각장애인, 청소년, 자폐인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나 약자들을 응원하며 함께 달리는 대회이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소수약자가 보호받는 평등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우리와 결코 완전히 동일한 출발선 상에 서 있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다문화 가정, 외국인 이주민과 근로자, 성소수자, 난민 등 더 많은 배려와 응원이 필요한 소외 계층이 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발맞추는 달리기를 계속할 것이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아테네까지 한숨에 내달린 그리스 청년 페이디피데스의 가슴 벅차오름을 안고,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소외를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껴지는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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