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물결 AI 빨라진 변화
AI 피로감 모두의 고민
기술속도 쫓을 필요없어
내 속도 맞춰 필요기능만
다 알지 않아도 되는 위로
윤정혜 경제팀장
해마다 연말이면 이듬해 쓸 다이어리를 장만하고, 가족이나 지인의 기념일을 표시해두는 것으로 새해 맞을 준비를 한다. 오래된 일종의 연례의식이다. 스마트폰을 두고 종이수첩에 기록하는 건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져보는 것도 있지만, 취재일정이나 누군가와의 약속시간과 장소를 글로 적음으로써 오래 기억하게 되는 까닭도 있다. 많아진 나이만큼 쌓인 다이어리를 가끔 꺼내 보고, 과거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수첩을 쓰는 이유 중 하나다.
수첩에 메모하고도 중요한 일정을 깜박 잊어 당혹스러웠던 경험이 생기면서 요즘엔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1분이 채 되기 전에 접수가 마감되는 도서관의 인기 강좌나 공연을 신청할 때, 예약 오픈시간과 동시에 마감되는 생태탐방원 예약이 필요한 경우에도 스마트폰 일정관리에서 알림 기능을 활용한다. 필요한 시간에 맞춰 알림을 울려주니 여간 편한 게 아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편의성 중간 어디 쯤에서 적절히 균형을 맞추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부시게 발전한 기술과 기능이 올해는 유독 버겁게 다가왔다. 일상과 업무에 녹아난 AI(인공지능)의 진화한 기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조급함이다.
불과 2~3년 전 만해도 생성형 AI에 적절한 명령을 내리는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유망직업으로 꼽혔고 실제로 산업 현장에서 높은 몸값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떤가. 교육현장에서는 마치 코딩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인재상의 필수 요건으로 인식되기도 했는데, 생성형 AI가 고도화된 지금, 코딩 개발자 조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다.
AI라는 거대 물결을 맞으면서, 교육을 받으며 AI기능을 익혀보지만 그때 뿐이다. 너무 많은 기능과 너무 다양한 AI 플랫폼, 진화하는 기술개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는 더 많고 다양하고 고도화된 AI의 활용을 요구하는 것 같아 마음이 더 바쁘다. 새로운 기술·기능에 밝은 2030세대의 빠른 적응과 활용을 보면서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감도 문득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전 우연하게 라디오에서 들었던 전문가 조언이 뜻밖의 위로가 됐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사람은 누구나 쫓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고, 뛰어난 AI기술로 인한 피로감은 나이와 상관없이 전 세대에서 각기 다른 이유들로 느낀다는 설명이었다. 이를테면, 어렵게 AI기능을 배웠는데, 얼마 지나지않아 업그레이된 버전이 출시되면서 또다른 학습이 요구돼 절망했다는 30대 직장인의 사연처럼. 기술격차로 인한 부담감은 누구가 가지고 있다는 부연이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 혼자만 이렇게 고민하는 게 아니구나'하는 안도감을 일단 가졌던 기억이 있다.
다 알지 않아도 되고, 모두의 속도에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 내 삶의 속도에 맞춰, 삶을 편안하게 하는 방향으로 필요한 기능과 도구만 익히고 활용해도 충분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은 어쩐지 혼란스러운 내게 위로와 위안이 됐다.
2026년, 새해에는 또 얼마나 많은 상상하기 어려운 기술들이 현실화될 될 것이고, 새로운 도구들도 등장할 것이다.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차오르는 숨에 허덕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비슷한 고민이나 이유로 불편함을 느끼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연히 읽게 된 지금의 이야기가 위로가 되면 좋겠다. 중요한 건 기술 속도가 아니라고 했다. 내 일상과 삶을 이롭고 편리하게 하는 데 도움을 받는 것. 내 속도대로 말이다.
윤정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