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훈 (주)비즈데이터 이사·파리1대학 법학박사
트럼프의 등장으로 세계는 하나의 질서로 설명되지 않는다. 전쟁은 멈추지 않고, 동맹은 재정의되며, 국제규칙은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연쇄 충돌,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중남미와 북극에서 벌어지는 지정학적 재편까지, 국제질서는 명백히 균열과 자국 우선주의의 국면에 들어섰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국제사회는 주권과 국제법을 강조했지만, 각국의 실제 선택은 에너지 의존도, 군사적 부담, 자국 정치 행보에 따라 갈렸다. 국제질서가 규범의 시대에서 힘과 전략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인도주의는 늘 강조되지만, 분쟁을 멈추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군사력과 외교적 이해관계였다. 여기에 이란의 민중 봉기와 미국·이스라엘의 개입 문제가 겹치면서, 중동은 내부 저항과 외부 전략이 동시에 작동하는 불안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국제사회는 도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힘과 자국의 이해관계로 움직인다.
이런 세계에서 최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미국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과 관련해 "국제법적 절차를 결여한 무력 사용은 국제 평화와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며 성명을 냈다. 주권 침해, 내정 간섭, 국제법 위반 가능성을 문제 삼는 발언이었다. 이 비판은 도덕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나, 국제정치의 현실에서는 순진한 수준을 넘어 외교적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다. 미국의 마두로 조치는 인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 자원, 중남미에서의 영향력 경쟁, 반미 블록 약화라는 전략적 계산들이 복합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당 의원들이 국제정치 인식에서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동맹국의 핵심적 이익 사안을 공개적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규탄하는 것은, 원칙 외교가 아니라 외교적 신호 관리 실패다. 특히 한국처럼 미국과 안보 동맹을 맺고 있는 나라가 강대국의 핵심적 이익 사안을 두고 공개적으로 명분으로 비판할 때, 그것은 원칙적 외교가 아니라 외교적 오해를 부르고 국익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일으킬 수 있다. 간단한 예로,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한다'는 발언이 수습불가한 첨예한 중일 갈등을 초래한 작금의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이 '우리는 언제나 정의롭다'로 홍보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 아니라 '이 현실 속에서 한국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다. 국내 정치의 분열을 외교 현장으로 옮기지 말아야 하며, 명분과 전략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명분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전략을 대체할 수는 없다. 마두로 사안에서 보듯, 국제정치의 행위는 대부분 명분을 동반하지만, 실제 결정은 자국의 이해관계에서 나온다.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끈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외교와 국제정치의 본질을 힘의 분포·동맹의 한계·국가의 체력을 정확히 계산한 뒤 선택하는 현실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우리 정치에서 명분이 전략을 대체하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도덕적 언어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는 정치적 책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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