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채 경북연구원 사업지원본부장
우리 경제는 분명 성장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고도성장을 지탱해온 기존 산업과 기술은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고, 인구구조 변화와 글로벌 질서 재편, 기술 패러다임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과거의 성장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신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경제 성장을 설명하는 시그모이드 곡선(Sigmoid Curve)은 지금의 위치를 비교적 명확히 보여준다. 초기에는 완만하게 시작해 어느 순간 급격히 성장하고, 이후 정체와 쇠퇴 국면으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우리 경제는 첫 번째 곡선의 정점 혹은 하강 국면에 근접해 있다. 이 단계에서 기존 기술을 조금씩 개선하는 점진적 혁신만으로는 다시 가파른 상승 국면으로 돌아서기 어렵다. 새로운 시그모이드 곡선을 열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기술, 산업, 제도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혁신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기존 기술과 산업의 효율을 높이는 개선형 혁신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술과 시장을 창출하는 도약형 혁신이다. 전자는 단기적인 생산성 제고와 경쟁력 방어에 유효하지만, 성장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돌파하지는 못한다. 반면 후자는 실패 위험이 크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새로운 성장 궤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국가 차원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느 쪽에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는 곧 미래를 선택하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주역(周易)의 궁변통구(窮變通久)에서도 이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사물이 극에 달하면 변하지 않을 수 없고, 변해야 통하고 통하면 오래 지속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는 바로 궁(窮)의 국면에 가깝다. 기존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때 변화를 회피하거나 미루면 정체는 장기화되고, 통하지 못하면 쇠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슘페터((J. Schumpeter)가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관점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새로운 혁신은 기존 질서 위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낡은 산업과 기술, 제도는 일정 부분 사라지고 재편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관리하지 못하면 사회적 비용과 저항이 커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혁신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과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장 둔화를 두려워하며 과거를 연장하는 전략이 아니다. 기존 산업을 고도화하면서, 신기술과 인재, 지역과 산업 간의 연결을 통해 전혀 다른 성장방식을 만들어야 한다. 변곡점은 위기의 다른 이름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는 출발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의 성공을 자랑하는 허세에 머물지 말고 다음 성공을 위한 절실한 선택이 필요하다. 우리 경제는 무역 의존도가 70%를 넘는 '글로벌 마트형 경제'다. 외부의 작은 환경 변화에도 언제든지 균형이 무너질 수 있는 살얼음판과 같다. 기술과 자본에서 앞서가는 선진국은 따라잡기 어렵고, 비용 경쟁력을 앞세운 신흥국의 추격을 따돌리기에도 점점 힘에 부치는 구조에 놓여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위기를 앞에 두고 하나로 뭉쳤던 고도성장 초기의 기억이다. 이를 단순한 향수나 꼰대식 발상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다시 한번 그때의 우리를 성찰하고 되찾아야 할 시점이다. 우리 경제의 주체는 벌써 삼대에 이르고 있다. 부자가 삼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경주의 최부잣집이 보여준 절제와 나눔의 철학을 거울로 삼아서 작은 성장 앞에서도 더욱 겸손한 노력과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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