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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그들의 독백② 가난이 먼저 삶을 가르치다…김위상이 말하는 인생 이야기

2026-01-21 17:05

밥보다 노동 놀이보단 집안일이 먼저였던 어린 시절
가난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 얻어
노동 현장의 마음을 법과 제도 안에서 보호할 것

"제 인생을 한 단어로요? 드라마였습니다"


안녕하세요. 국민의힘 김위상입니다. 기사를 통해 저를 접하신 분들도 많겠지만, 오늘은 토론도, 논평도, 공방도 조금 내려놓고 '보통사람 김위상'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누군가 제게 "의원님 인생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뭡니까"라고 묻더군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드라마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다"라고요.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누구나 굴곡이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굴곡이 조금 이른 나이에, 조금 거칠게 시작됐습니다.


#청송의 산골, 가난이 먼저 삶을 가르치다


저는 1959년 경북 청송의 한 시골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추웠던 초가집, 산비탈을 일궈 만든 밭, 호롱불 아래서의 밤이 일상이었죠. 부모님은 논이 없었기 때문에 산을 깎아 농작물을 키워 다섯 남매를 키우셨습니다. 그 시절 저는 가난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밥보다 노동이 먼저였고, 놀이보다 집안 일이 먼저였습니다.


가난은 결국 가족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큰 형은 부자 친구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누나들 역시 식모살이를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는 왜 가족들이 떨어져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어느 날 형이 머슴살이를 하던 부자집 아들이 제 물건을 가져가더군요. 화가 나 그 친구를 밀었는데, 전 그날 형에게 처음으로 얻어 맞았죠. 너무 서러워 하루 종일 울다가 깨달았습니다. 제가 멋대로 행동하면 형이 머슴살이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요. 바로 친구를 찾아가 사과했어요. 먹을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머슴살이를 선택한 형의 마음을 이해한 순간이었어요


집안 상황은 점점 어려워졌어요. 논이 없어 벼농사도 지을 수 없었던 우리는 보리로 버텼지만, 굶고 자는 날이 더 많았어요. 결국 어머니도 서울로 식모살이를 떠나실 수밖에 없었어요. 그 때가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울며 매달리는 막내 여동생을 달래며 떠나가던 엄마의 뒷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결국 5남매인 우리는 저와 여동생을 빼고 모두 부산, 서울, 월남전쟁터 등으로 흩어졌지요. 가난은 내게 외로움을 가르쳤습니다.


김위상 의원은 어린 시절 사진이 단 한장도 없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진은 김위상 의원이 설명한 당시 숭인동 분위기와 유사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김위상 의원은 어린 시절 사진이 단 한장도 없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진은 김위상 의원이 설명한 당시 숭인동 분위기와 유사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기차, 그리고 전깃불


엄마를 그리워하며 버티기를 1년, 드디어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식모살이를 하며 번 돈을 가지고 저를 데리러 오셨죠. 너무 좋아 소리를 지르며 동네를 뛰어다녔어요. 혼자 남게 될 제 여동생 사정보다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어요.


내가 서울로 떠나는 날 동생은 계속 울었지만, 난 웃었어요. 추수가 끝난 논바닥을 울며 쫓아오던 동생을 떼어내려고 더 빨리 뛰었어요. 청송에서 대구로 오는 버스에서 '이제 누가 내 동생이랑 소꿉놀이를 해줄까'란 생각이 들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지요.


슬픔은 금방 잊혀지더군요. 그날 대구역에서 기차를 처음 봤거든요. 서울역에 도착해 전깃불도 처음 봤습니다. 고향의 호롱불과는 완전히 다른 빛이었습니다. 저는 그 빛이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은 "서울은 별천지다"라고 했는데,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날 알았습니다.


그런데 별천지에도, 그늘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산 곳은 숭인동에 위치한 판자촌이었죠. 옆방 이야기까지 다 들렸고 지붕에는 비가 새는 걸 막으려고 돌과 벽돌을 올려두었습니다. 그래도 새는 비는 어쩔 수 없더군요. 달랑 방 한 칸, 그게 '서울살이'의 시작이었습니다.


김위상 의원이 교도소 출소 당일 모습.  노동조합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위상 의원실 제공

김위상 의원이 교도소 출소 당일 모습. 노동조합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위상 의원실 제공

#신문 한 장이 저녁이 되던 시절


현실은 무섭더군요. 중학교에 가려니 등록금은커녕 교복 살 돈도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큰형이 월남 파병에서 벌어온 돈으로 마련한 땅과 소를 팔았습니다. 당시 형은 자식이 없던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기에, 부모님은 저라도 교육을 시키려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청송에서 마련한 8만원을 용산역에서 소매치기를 당했어요. 월남에서 형이 고생해 벌어온 돈은 한 순간에 자취를 감췄고 모든 게 나 때문이란 생각에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에겐 슬픔도 사치였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였죠. 중학교를 그만두고, 신문을 돌렸습니다. 한 달 월급 800원, 구역을 더 맡아 1천600원을 받았습니다. 남는 신문을 팔아서 라면 한 그릇을 사먹을 때면 그날의 '호사'였습니다. 신문을 팔지 않은 시간에는 껌을 팔았어요. 다방에서 절을 수십 번 하면 껌 한 통은 사주더라고요. 그 작은 손에 쥔 돈이 우리 집 저녁을 결정했습니다.


노동현장에서 살았습니다. 막노동, 포장마차, 시장, 공장, 포항제철 협력업체, 조선소까지. 그러다 스물일곱, 마음속에서 한 문장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배워야 한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봤습니다. 공부는 늦었지만, 절실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현장의 대우는 냉혹했고 거칠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욕을 먹는 잘못된 문화를 바꾸고 정당한 노동이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김위상 의원이 교도소에서 노조원에게 적은 1천통의 편지. 김위상 의원실 제공

김위상 의원이 교도소에서 노조원에게 적은 1천통의 편지. 김위상 의원실 제공

#노동에 뛰어들다


공부를 위해 비교적 자유롭다고 생각한 택시기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은 처참했습니다. 관리자가 나이 많은 기사에게 "야! 어이!"라며 반발로 부르고, 사고가 나면 비용을 떠넘기고, 아파서 못 나와도 사납금을 요구하더군요.


쉬는 날도 쉬는 게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쉬면, 누군가가 더 택시를 몰아야 했습니다. 차가 서면 회사는 손해라며, 다른 기사에게 노동을 강요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 부조리함을 반드시 바꾸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아주 작은 것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야! 어이!"라는 호칭을 "기사님"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는 것, 그게 제 싸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다니던 택시회사의 노조위원장을 시작으로 대구시지부 노사대책부장, 대구택시지역본부 의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대구지역본부 의장을 거치며 많은 부조리를 개선했습니다. 당시 8부제였던 택시 운행 시스템을 6부제로 바꿨고 운송수익금 통일, 노조 쉼터 설립, 노사 평화전당 건립 등 노동자들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시설 등을 지역에 정착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어요. 전임 의장들의 비리를 저에게 책임을 묻더군요. 제가 2003년에 의장이 됐는데 1990년대말 의장들이 집행한 금액에 대해 문제가 제기된 거죠.


교도소 안에서 너무 억울한 마음에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조원들에게 1천 통의 편지를 썼어요. 그래서일까요. 놀랍게도 옥중에서 다시 의장에 선출됐습니다. 조합원들이 제가 보낸 편지를 보고 "그래도 김위상의 마음은 진짜다"라고 믿어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위상 의원이 국회에서 질의하고 있다. 김위상 의원실 제공

김위상 의원이 국회에서 질의하고 있다. 김위상 의원실 제공

#김위상의 정치


오늘 제가 들려드린 이야기에는 제가 정치를 하게 된 이유가 녹아 있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현장의 마음을 법과 제도 안에서 보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가끔 청송의 산골을 떠올립니다. 호롱불 아래에서 잠들던 밤, 서울로 올라오던 기차 안, 서울에서 전깃불을 처음 보던 날, 신문을 팔아 라면을 사먹던 아침, 택시기사에게 "야! 어이!"라고 부르던 목소리. 그 장면들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자."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 '당연한 것'을 실제로 당연하게 만드는 일, 저는 그 일을 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인생이 드라마 같았던 이유는, 해피엔딩이라서가 아닙니다. 버티고, 또 버티며 도전을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들려드린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기자 이미지

서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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