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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탄생 100주년 후…다시 보는 이오덕·박주일의 삶과 문학

2026-01-22 16:22
경북 영천 출신 아동문학가인 이오덕 선생. <양철북출판사 제공>

경북 영천 출신 아동문학가인 이오덕 선생. <양철북출판사 제공>

한 생애를 바쳐 문학을 가르쳐온 이들이 있다. 1925년 경북 영천 현서면(현 청송군)에서 태어난 한 소년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어려운 형편으로 학력은 보통학교(초등학교)와 2년제 농업실수학교가 다이지만, 책 읽기를 꾸준히 하고 배움을 놓지 않았다. 그런 그는 향후 초등 교사가 되어 농촌의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다.


경북 경주 출신의 시인 박주일 선생. <영남일보 DB>

경북 경주 출신의 시인 박주일 선생. <영남일보 DB>

같은 해 경주에서 태어난 또 다른 소년이 있다. 바이올린 좋아하는 아버지의 음악성을 문학적 기질로 이어받아, 창작과 시 쓰기에 관심을 가졌다. 동생들도 비슷해 팔남매 중 네 형제가 문학을 한다. 그런 그는 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하고, 대구에서 오랜 시간 교사로 일하며 시를 쓴다. 교직 생활을 마치곤 시 창작 교실을 운영하며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일생 15권의 시집을 펴냈다.


1925년 출생한 이오덕(왼쪽) 아동문학가와 박주일 시인의 인물 일러스트컷. <대구문학관 제공>

1925년 출생한 이오덕(왼쪽) 아동문학가와 박주일 시인의 인물 일러스트컷. <대구문학관 제공>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오덕(1925~2003), 박주일(1925~2009) 선생으로, 우리 지역 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이다. 이오덕 선생은 아동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박주일 선생은 신선한 상상력과 섬세한 감각으로 삶의 혜안을 밝혔다고 평가받는다. 한국 문학사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이뤄낸 이들의 삶과 문학은 탄생 100주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있다.


초등학교 교장 시절의 이오덕 선생.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해 초등 교사가 됐다. <영남일보 DB>

초등학교 교장 시절의 이오덕 선생.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해 초등 교사가 됐다. <영남일보 DB>

"아이들이 건강히 자랄 수 있는 '참된 시' 주자"

이오덕 선생은 맑은 날엔 밭을 가꾸고, 비가 오면 교실에서 공부하며 "땀 흘리며 일하는 것과 밥을 해서 함께 나눠 먹는 것"을 배웠다. 이런 학창 시절의 경험은 평생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돕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해 초등 교사가 된 그는 청송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글의 형식성에 역점을 두는 글짓기 교육보다, 어린이들의 삶을 중시하는 글쓰기 교육에 중점을 뒀다. 특히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제안했다.


경북 청송 이오덕작은문학관 마을. 이오덕 선생은 청송에서 초등 교사로 일했다. <영남일보 DB>

경북 청송 이오덕작은문학관 마을. 이오덕 선생은 청송에서 초등 교사로 일했다. <영남일보 DB>

"우리가 하는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바르게, 건강하게 키워가는 데 있다. 아이들을 참된 인간으로 길러가는 데에 글쓰기가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어떤 모범적인 글, 완전한 글을 얻으려고 아이들을 지도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이전에 살아가는 길부터 찾게 한다. 그래서 쓸 거리를 찾고, 구상을 하고, 글을 다듬고 고치고, 감상 비평하는 가운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고, 남을 이해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무엇이 가치가 있는가를 알고, 살아 있는 말을 쓰는 태도를 익히게 한다. 이것이 삶을 가꾸는 글쓰기다." (1988년 제3회 단재상 수상소감 중에서)


이오덕 선생은 초등 교사이면서 동시와 동화, 수필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1955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꿩'이 당선됐다. 그의 작품에는 초등 교사로 일하며 학교 안팎에서 만난 아이들이 있다. 그는 동심을 옹호하면서도 구어체적 서술로 어린이들의 생활 장면에 주목한다.


"진달래야!/ 그리도 이 땅이 좋더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헐벗은 이 땅이/ 그리도 좋더냐?(중략) 진달래야./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차라리 시들어지는/ 너무나 순진한 어린이 같은 꽃아!/ 내 마음속 환히 피어 있거라./ 영원히 붉게 붉게 피어 있거라." ('진달래' 중에서)


이오덕 첫 동시집 별들의 합창(1966) <대구문학관 제공>

이오덕 첫 동시집 '별들의 합창'(1966) <대구문학관 제공>

다만 그의 문학적 생애는 아동문학 작품의 창작보다는 평론 활동에 역점을 둔다. 그는 문학적 관념성이나 교육의 권위주의적 요소를 배척하고, 어린이들의 삶을 억압하는 각종 현실을 꼬집었다. 첫 동시집 '별들의 합창'(1966)의 저자의 말에서도 "동시에서 내가 해결하고자 한 것은 눈깔사탕 같은 것들을 어린이들에게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지금의 동시에 대신하여,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데 필요한 영양소가 될 수 있는 참된 시를 주자는 데 있었다"고 밝힌다. 특히 1974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평론 '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선 기존의 아동문학을 "유아독존의 심리 세계만을 희롱하여 이국적인 것, 환상적인 것, 탐미적인 것, 혹은 감각적인 기교만을 존중하는 경향"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해 기성 문단에 충격을 줬다.


이오덕 아동문학가 <영남일보 DB>

이오덕 아동문학가 <영남일보 DB>

1983년엔 교사들을 모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1988년엔 우리말연구소를 창립해 글쓰기 교육 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쓴다. 1992년 '우리문장 바로쓰기'와 1995년 '우리글 바로쓰기'(전3권)는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의 잔재를 지적하고 걸러내기 위해 집필한 것이다. 이렇듯 한평생을 기존의 타성과 권위에 도전한 그는 2003년 8월25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주일 시인. 고향은 경북 경주지만 대구 문단에서 오랜 시간 활동했다. <영남일보 DB>

박주일 시인. 고향은 경북 경주지만 대구 문단에서 오랜 시간 활동했다. <영남일보 DB>

문학 강좌로 수많은 시인 배출…지역 문단 활성화

"밝은 눈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다. 천리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힘, 이 눈의 힘이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라고 고희를 맞이한 박주일 선생은, 전 생애 동안 시에 도전하며 삶의 비밀을 풀어나갔다. 그의 고향은 경북 경주지만 오랜 시간 활동한 곳은 대구다. 대구공고, 대구여구, 대구상고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1967년 서정주 시인의 추천(현대문학)으로 지역 문단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박주일 첫 시집 미간(1973) <대구문학관 제공>

박주일 첫 시집 '미간'(1973) <대구문학관 제공>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 쉬었다 간 자리다/ 혹은 그 흔적이다// 달리는 열차의 마디는 역이다/ 나의 집은 나의 마디다// 무덤은/ 인간이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마디다" (마디라는 것은)


'미간'(1973), '모양성'(1976), '바람아 문둥아'(1979), '신라유물시초'(1980), '피반령(皮盤嶺)을 지나면서'(1983) 등 수많은 시집을 펴낸 그는 주변의 삶과 자연에 대해 관조하는, 실존의 슬픔을 수용하는 시를 다수 발표했다. 대표적으로 '바람아 문둥아'에선 세계와 대결하는 한 개인의 아픔과 절명을 자학적으로 토로하고, '신라유물시초'에선 유추를 통해 생의 보편성을 탐구했다. 특히 "그는 사변(思辨)을 기질적으로 꺼려한다. 늘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라는 김춘수 시인의 평처럼, 감각의 섬세함과 문장의 밀도가 눈에 띈다.


2009년 열린 은시문학회 행사. 대구문학아카데미 출신들로 구성돼 있다. 앞줄 왼쪽 두번째가 박주일 시인. <영남일보 DB>

2009년 열린 은시문학회 행사. 대구문학아카데미 출신들로 구성돼 있다. 앞줄 왼쪽 두번째가 박주일 시인. <영남일보 DB>

교직을 떠난 후에는 '대구문학아카데미'의 모태가 된 문예창작원을 1984년 개설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문학 강좌를 진행했는데, 이를 통해 수많은 신인 작가를 발굴해 지역 문단 활성화에 기여했다. 고(故) 배영옥 시인을 비롯해 곽홍란, 문수영, 이규리, 이선영, 정숙 시인 등이 그의 제자다. 제자들이 현재도 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생의 문학적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다.


2010년 그의 1주기를 맞아 열린 추모제에서 문수영 시인은 "선생에게 시는 인생 그 자체였다. 오직 시 하나를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회상했다. 이하석 시인은 "선생 같은 어른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기에 우리 지역에서 쉽지 않았던 진보적 가치를 내건 문학활동이 원만하면서도 더욱 깊숙한 골을 가질 수 있었다"고 유고시집의 추모글을 쓴 바 있다.


"나무와 풀이 결국은/ 한길로 간다/ 나무의 배경은 하늘이지만/ 풀의 배경은 나무 그늘이다/ 지금 그 그늘에 하늘과 구름이 내려 와 있다/ 바람이 그 위를 밟고/ 느린 걸음으로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백발이/ 갈잎에서 파도치게 한다" (동행)


고희를 바라보며 쓴 시에서는 노년 특유의 감성과 심경이 엿보인다. '나이듦'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절망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안온한 마음으로 주변을 관조한다. 선생이 말한 '천리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힘'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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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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