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 원자력 생태계 갖춘 경주, 차세대 에너지 실증 무대 부상
경주엑스포대공원 한수원 미래에너지관(SSNC) 내부 전시 공간에 설치된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모형. 원자로 구조를 단면 형태로 보여줘 관람객들이 작동 개념과 설비 구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경주 읍천항에서 바라본 월성원전. 영남일보DB
문무대왕과학연구소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산하기관으로 핵심 연구시설과 연구기반시설, 연구지원시설 등 총 18개 시설이 들어서며 소형모듈 원자로(SMR) 개발을 주도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진다. 사진은 문무대왕과학연구소 조감도. 경주시 제공
경주 SMR 국가산단은 문무대왕면 일원 113만5천㎡ 부지에 2028년 착공, 2032년 준공을 목표로 조성될 예정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시행을 맡았다. 산단은 i-SMR 제조와 소재·부품·장비 집적, 글로벌 수출형 공급망 구축을 담당한다. 사진은 SMR 국가산단 조감도. 경주시 제공
포스코 포항제철소 2열연 공장 제품 생산 모습. 포스코 제공
포스코 포항제철소 전경. 포스코 제공
정부가 원자력발전소 신규 건설 기조를 유지하고 차세대 원전으로 꼽히는 소형모듈원자로(SMR) 부지 공모를 개시하면서 경주가 유력 후보지로 부상하고 있다. 여러 지자체가 유치를 희망하고 있지만 원자력 산업 기반과 정책 실현 가능성을 함께 갖춘 지역은 많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주는 '왜 i-SMR인가', '왜 이곳이 적합한가'란 질문에 동시에 답할 수 있는 후보지로 평가받고 있다.
◆ i-SMR은 작은 원전 넘어 '산업 인프라'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난달 30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된 신규 원전(대형원전 2기·SMR 1기) 건설을 위한 후보부지 자율유치 공모를 개시했다. 유치를 원하는 기초자치단체는 지방의회 동의를 거쳐 오는 3월30일까지 유치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후 오는 6월까지 신청 부지에 대한 기초조사와 현장실사, 주민 여론조사 등을 거쳐 최종 후보지가 선정된다.
공모 발표 직후 경북도와 경주시는 공동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키며 대응에 나섰다. 행정·입지·지역 3개 분과로 구성된 TF에는 도와 시는 물론 산·학·연 관계자들이 참여해 유치 전략을 논의하고 있다. 공모와 동시에 조직을 가동한 지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SMR은 전기출력 300MWe 이하급 원자로다. 주요 설비를 공장에서 모듈 형태로 제작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 특징이다. 표준화된 설계를 바탕으로 건설 기간과 비용을 예측 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고 전력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대형 원전과 운용 목적이 다르다.
한국이 개발 중인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 'i-SMR'은 모듈당 170MWe 출력의 원자로 4기를 결합한 총 680MWe 규모로 설계됐다. 중소도시 하나를 안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전력량이며 설계 수명은 80년을 목표로 한다.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i-SMR 초도호기의 목표 준공 시점은 2035년으로 제시돼 있다.
안전성 측면에서도 구조적 차별성이 있다. i-SMR은 원자로와 주요 설비를 하나의 용기에 통합한 일체형 구조를 적용해 대구경 배관 파단에 따른 냉각수 유출 사고 가능성을 낮추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외부 전원이 상실되는 상황에서도 자연 순환 방식으로 열을 제거하는 피동안전계통을 적용해 비상 시 전원·운전원 조치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붕산(Bolic acid)을 사용하지 않는 무붕산 운전 개념도 포함돼 있다. 무엇보다 i-SMR은 전기 생산에 더해 공정열·지역난방·담수화·수소 생산 등으로 확장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발전 설비를 넘어 산업 인프라로도 주목받는다.
◆ 부지 경쟁의 핵심은 '전주기 생태계'
한수원이 공모문을 통해 제시한 후보 부지 평가 기준은 네 가지다. △부지 적정성 △환경성 △건설 적합성 △주민 수용성으로 각 항목은 25점씩 총 100점 만점으로 평가된다.
부지 적정성에는 지질·지반 안정성, 위치 제한, 외부 사고 영향, 현장 여건 등이 포함된다. 환경성은 해양·육상 생태계와 해양환경, 토지 이용 등이 평가 대상이다. 건설 적합성에는 전력망 연계, 용수 공급, 부지 조성 여건, 전력 계통 안정성 등이 포함되며 주민 수용성은 지방의회 동의와 주민 여론, 지역 균형발전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본다.
경주시가 검토 중인 후보지는 월성원전 권역 인근 유휴부지로, 이미 지질·지진 안전성 검증이 이뤄진 지역이다. i-SMR 1기 건설에 필요한 최소 부지면적은 약 49만6천㎡(약 15만평)로 경주가 확보한 유휴부지(약 50만㎡)는 이 요건을 충족한다. 영구정지된 월성 1호기의 기존 송전설비와 전력 계통을 활용할 수 있어 신규 인프라 구축 부담도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경주는 문무대왕과학연구소(설계·실증), 중수로해체기술원(해체·폐기),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상업운전 중인 월성원전까지 한 지역에 모여 있는 '원자력 전주기 생태계'의 완성도가 강점으로 꼽힌다. 실제 문무대왕과학연구소는 i-SMR 핵심 기술 개발과 실증을 담당할 예정이며, 월성 인근에는 i-SMR 모듈 제작을 위한 국가산업단지와 제작지원센터 조성이 추진 중이다. 연구·제작·운영 현장이 수㎞ 이내에 집적된 구조는 초도호기 사업에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경험을 빠르게 축적하는 데 유리하다는 평가다.
◆ 포항 철강·수소환원제철과 직결
경주 i-SMR 유치의 또 다른 축은 포항 철강산업과의 연계다. 포스코를 비롯한 포항권 철강기업들은 중국발 저가 철강재의 과잉 공급과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이란 이중 부담 속에서 수익성과 국제 경쟁력이 동시에 압박받는 상황이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미국의 철강 관세 강화까지 겹치며 기존 고로 중심의 생산 구조로는 장기 대응이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가 추진 중인 수소환원제철(HyREX)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전략적 해법으로 꼽힌다. 수소환원제철은 철광석의 산소를 제거하는 환원제로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하는 공정으로 철강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다만 이 공정은 막대한 양의 청정 수소와 이를 생산·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무탄소 전력을 전제로 한다.
문제는 전력 공급의 안정성이다. 제철소는 24시간 연속 가동이 필수적인 산업 구조를 갖고 있어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만으로는 생산이 어렵다. 철강·에너지 업계가 i-SMR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저부하 전원으로서 대규모 무탄소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 수소 생산과 제철 공정을 동시에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된다.
경주시가 지난해 8월 경북도, 포스코홀딩스와 체결한 SMR 협력 업무협약은 i-SMR 1호기 경주 유치뿐 아니라, SMR 전력을 활용한 수소 생산과 수소환원제철 공정 연계를 공동으로 모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발전-수소-철강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활용 구조를 하나의 권역에서 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경주시에 따르면 i-SMR 1기를 건설할 경우, 법정 지원금은 80년간 약 7천800억원으로 추산된다.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100억원 규모다. 여기에 건설·운영 과정에서의 고용 창출, 연관 산업 유치, SMR 국가산단 조성 효과까지 더해지면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종 관문은 주민 수용성과 지방의회 동의다. 오상도 경주시의회 원전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속도를 내기보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는 것이 우선"이라며 "원전 정책 담당 부서 설명과 특위 논의, 전체 의원 간담회로 이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동경주 지역 주민과 발전협의회, 이장단 의견을 직접 듣는 과정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박영숙 경주시 원자력정책과장은 "현재 가장 중요한 과제는 주민 수용성 제고"라며 "공모 일정이 촉박하지만 시민에게 i-SMR을 설명하고 이해를 넓히는 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i-SMR 초도호기 유치를 "대한민국 에너지 백년대계를 좌우할 선택"이라고 규정했다. 주 시장은 "경주는 연구·실증·제조·운영·해체에 이르는 원자력 전주기가 집적된 국내 유일의 완결형 클러스터"라며 "검증된 부지와 기존 전력 계통망을 활용할 수 있는 조건까지 갖춘 도시는 경주"라고 강조했다.
장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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