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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농인들의 정체성 ‘수어’…인식은 확산하는데, 통역 보급은 제자리

2026-02-05 16:26
수어는 농인의 모국어로 한국어, 영어, 일본어처럼 하나의 독립된 언어다. <게티이미지뱅크>

수어는 농인의 모국어로 한국어, 영어, 일본어처럼 하나의 독립된 언어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당연하게 선물처럼 받는 것을, 어떤 사람은 평생 싸워서 얻는다. 태어날 때부터 언어가 졍해져 있는 이들과 달리, 자신의 언어를 '언어'로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 싸워야 했던 이들이 있다. 바로 '농인'들이다. 농인은 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을 일컫는다. 모든 청각장애인이 모국어로 수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가운데는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청각장애인이 된 이들이 많다. 즉,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넓은 개념의 의학적 표현이고, 농인은 그 가운데 수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농인 다수는 수어를 모국어나 주 언어로 습득하고, 본인이 태어난 국가의 언어는 제2언어로 배운다. 음성언어 대신 시각에 기반한 수화언어를 사용하기에 수어를 사용하며 생기는 고유한 생활양식이 있다. 때문에 농인에게 수어는 자신의 정체성과 같고, 농문화에서도 한국어, 영어, 일본어처럼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기능한다.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 산하 대구수어교육원에서 수어교실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대구농아인협회 제공>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 산하 대구수어교육원에서 수어교실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대구농아인협회 제공>

수어가 독립된 언어임을 알리기 위한 여러 노력 끝에 10년 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다. 이에 따라 수어는 한국어와 함께 대한민국의 공용어로 인정됐다. 한국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은 자신의 언어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됐다. 정부는 이 법이 제정된 2월3일을 2021년부터 '한국수어의 날'로 지정해 수어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 있다.


최근 여섯 번째 한국수어의 날을 맞았다. 수어가 법적으로 독립된 언어로 지정되고, 수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아졌지만 공백은 여전하다. 부족한 수어통역 서비스, 교육 등으로 농인들의 정보 접근권은 현저히 떨어진다. 농인과 청인 간 소통의 장벽을 낮추기 위해, 수어의 세계와 농인들이 일상 속 겪는 어려움을 들여다봤다.


사랑합니다를 의미하는 한국수어. 주먹 위에 다른 한 손을 돌리며 표현하면 된다. <대구농아인협회 제공>

'사랑합니다'를 의미하는 한국수어. 주먹 위에 다른 한 손을 돌리며 표현하면 된다. <대구농아인협회 제공>

◆나라마다 다른 언어, 같은 동작도 표정 따라 의미 천지차이


수어는 '수화 언어'를 줄인 말로, 손짓이나 몸짓, 표정 등 시각적인 방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의사소통 방식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수어는 대한민국 청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수어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다르듯 수어 역시 나라마다 다르다. 또 수어를 모국어로 배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국에 살아도 대다수 농인에게 한국어는 외국어와 다름 없다. 농인들이 한글을 익히는 것은 청인이 외국어를 배우는 일과 비슷하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문법 체계도 완전히 다른데, 어순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어는 조사가 없다. 따라서 한국어 문법에 맞춰 수어를 표현할 경우 소통이 어렵다.


수어에서는 손동작뿐만 아니라 표정이나 몸의 움직임 같은 비수지신호도 의미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수어에서는 손동작뿐만 아니라 표정이나 몸의 움직임 같은 비수지신호도 의미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손과 손가락의 모양(수형), 손바닥의 방향(수향), 손의 위치(수위), 손의 움직임(수동) 등 손동작뿐만 아니라 표정이나 몸의 움직임 같은 비수지신호도 의미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같은 동작이라도 표정과 제스처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가, 부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또 수어엔 '님' 표현은 존재하지만 반말과 존댓말 구분이 없고, 음성언어에는 이중적인 표현이 많지만 수어에는 그런 장치가 거의 없다. 생각과 감정을 돌려 말하지 않고 풍부한 표정과 함께 드러낼 수 있다보니 그 어떤 언어보다 직관적이다. 의미를 한 번에 전달하기 어렵거나, 수어가 없는 신조어 같은 표현은 손가락으로 자·모음을 하나씩 표현하는 지문자를 활용한다.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의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된 대구도시철도 역명 수어 표기 QR코드 노선도. <대구도시철도 제공>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의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된 대구도시철도 역명 수어 표기 QR코드 노선도. <대구도시철도 제공>

국립국어원이 제공하는 '한국수어사전'(sldict.korean.go.kr)에는 1만5천개가 넘는 수어가 등록돼 있다. 일상생활 수어부터 법률·교통·의학 등 전문용어, 국립 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 등 문화정보 수어도 담겨 있다.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외래어, 고유명사 등은 관련 기관의 연구를 거쳐 지속적으로 보급된다. 최근엔 특정 지역의 지명이나 지하철역명 등을 수어로 만드는 시도가 이어진다. 대구에서는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의 추진 아래 대구 지명에 수어를 입힌 '대구지명 수어 관광안내지도', 각 지하철역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와 특성을 고려해 제작한 '대구시 지하철역명 수어 가이드북' 등이 발간됐다.


2020년 대구시청에서 열린 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수어통역사가 당시 권영진 대구시장의 발표 내용을 수어통역하고 있다. <대구시 제공>

2020년 대구시청에서 열린 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수어통역사가 당시 권영진 대구시장의 발표 내용을 수어통역하고 있다. <대구시 제공>

◆펜데믹 이후 가시화되며 인식 확산…드라마엔 관련 직업 등장


펜데믹 이후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방송이 확대되고, 수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가했다. 당시 질병관리청이 매일 코로나19 브리핑을 진행할 때, 화면 한쪽에 수어통역이 함께 노출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많은 시민이 수어를 일상적으로 접하며 그 존재와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대구에서도 바이러스 유행 초기 브리핑에 수어통역을 빠르게 도입하며 시민들의 인식도 자연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유선희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 기획운영부장은 "그때를 기점으로 수어를 배우고 싶다는 문의가 늘었고, 수어통역사라는 직업에 대해 질문도 들어오는 등 수어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고 했다.


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에서 수어통역사 역을 맡아 연기하는 배우 채수빈. <지금 거신 전화는 캡처>

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에서 수어통역사 역을 맡아 연기하는 배우 채수빈. <'지금 거신 전화는' 캡처>

드라마나 영화에도 수어를 사용하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2022년 드라마인 '우리들의 블루스'는 청각장애인 '별이'가 나와 장애가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잘 표현했다고 호평받았다. 별이를 연기한 배우 이소별은 실제로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 2024년 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에서는 배우 채수빈이 수어통역사 역을 맡았는데, 이 역할로 MBC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받은 채수빈은 수어로 수상 소감을 전해 화제가 됐다.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고용노동부·경제사회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 정책간담회 사후 브리핑에서 수어통역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고용노동부·경제사회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 정책간담회 사후 브리핑에서 수어통역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알 권리는 부족…교육→고용→소득 소외의 악순환 끊어야


하지만 농인들이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아직 부족하다. 현행 제도상 지상파 방송의 수어통역 편성 의무 비율은 전체 방송 시간의 7% 수준에 그친다. 이는 뉴스·시사·오락 등 프로그램 유형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 방송 시간을 기준으로 산정된다. 방송에서의 수어통역 서비스는 농인들의 알 권리와 직결되는 문제다. 일례로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수어통역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농인들은 혼란이 더욱 컸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지난해 대구 달서구 대구직업능력개발원에서 열린 2025 대구 장애인 취업박람회에서 한 장애인 구직자가 수어 통역사와 현장 면접을 보고 있다. <영남일보 DB>

지난해 대구 달서구 대구직업능력개발원에서 열린 '2025 대구 장애인 취업박람회'에서 한 장애인 구직자가 수어 통역사와 현장 면접을 보고 있다. <영남일보 DB>

수어를 통해 교육받을 수 있는 곳도 많지 않다보니 경제활동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한글을 익힌 뒤 청각장애를 갖게 된 경우 문자나 속기 지원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수어가 모국어인 농인들은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교육을 받더라도 수어통역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요구를 수용해줄 수 있는 기관이 실제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4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4년 등록장애인 현황'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새로 등록된 장애인 8만5천947명 가운데 가장 많은 유형은 청각장애(31.7%)였다. 하지만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발표한 '2025년 상반기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고용률이 42.6%로 가장 높고, 지체장애인(42.3%), 발달장애인(30.0%) 순이었으며 청각장애인은 29.5%에 그쳤다.


유선희 부장은 "평생교육이란 말을 많이 하는 요즘, 농인들은 취미활동을 하더라도 수어통역이나 문자 지원이 없으면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며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경제활동을 하고, 경제활동을 해야 소득이 뒷받침되는데,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가 어렵다보니 경제활동과 소득에서도 연쇄적으로 뒤처진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한국농아인협회 대구시협회는 대구지역 농아인의 복지 증진을 위한 정책 대안을 논의하고자 기초단체 의원들을 초청해 정책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구농아인협회는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타 복지 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돼 온 농아인 복지 현실을 짚으며 △농아인 평생교육 및 여가활동이 가능한 쉼터 설치 △대구수어교육원 전문성 강화 △농아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수어 QR코드 선거공보물 제작 등의 필요성을 제안하고 제도적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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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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