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참외원예농협 농산물공판장 근무
작년 하루만에 4만4천상자 처리하기도
19일 12시 경매시작에 앞서 한민 경매사의 눈초리가 매섭다. <석현철 기자>
정오를 알리는 시계바늘이 수직으로 겹치는 순간, 성주참외원예농협 농산물공판장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노란 전쟁터'로 변모한다. 산처럼 쌓인 참외 상자들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그 정적을 깨는 것은 한 남자의 우렁찬 사자후다.
"자~아! 3다이! 10박스, 봐라! 몇 개!, 몇 개!" 마이크를 쥔 한민 경매사(52)의 굵직한 목소리가 공판장 천장을 때리자, 입찰기를 쥔 중간도매인들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처럼 분주해진다.
이날 출하된 물량은 1만 1,800상자.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만여 개의 상자가 주인을 찾아가는 광경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한 경매사는 "오늘은 한산한 편"이라며 담담하게 미소 짓는다. 참외 출하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에는 하루 4만 상자가 넘는 물량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작년 최대 기록인 4만 4,000상자를 처리하던 날엔 꼬박 3시간 동안 쉼 없이 목을 써야 했다. 찰나의 순간에 가격을 결정하는 경매사의 판단은 곧 시장의 흐름이 되고 농민의 희망이 된다.
한민 경매사가 경매대에 오른 지도 어느덧 22년. 2003년 처음 자격증을 따고 단상에 섰을 때만 해도 세상은 지금과 달랐다. 손가락 신호로 가격을 주고받던 '수지경매' 시절, 서슬 퍼런 상인들 틈에서 수없이 깨지고 부딪혔다. "처음 3년은 정말 지옥 같았습니다. 손가락 신호를 놓쳐 욕을 먹기도 하고, 기 싸움에 밀려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기도 했죠." 하지만 그 모진 풍파는 그를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물량을 읽는 눈, 품질을 가려내는 코, 시장의 온도를 느끼는 피부는 그 시절의 흉터 위로 돋아난 굳은살 같은 것이다.
그의 경매 철학은 명확하다. 경매사는 파는 이와 사는 이의 중간에 서야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한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있다. "경매장에는 상인들만 가득하지, 정작 주인공인 농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농민의 대리인이라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습니다." 그 진심은 경매 도중 터져 나오는 "다시 봐라!"라는 외침에 고스란히 담긴다. 낙찰가가 농민의 땀방울 값에 못 미친다고 판단되면 그는 단호히 경매를 멈춘다. 다시 호가를 부르고 가격을 끌어올리는 그 몇 초의 실랑이가 농민의 한 해 살림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해 전자식 경매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거래는 더 투명하고 빨라졌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한 경매사는 여전히 '사람의 힘'을 믿는다. 기계는 숫자를 계산할 뿐, 참외 한 알에 담긴 농민의 노고와 간절함까지 읽어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투명한 모니터 너머로 오가는 치열한 수 싸움 속에서도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람 대 사람'의 신뢰다.
19일 성주참외원예농협 농산물 공판장에서 참외 경매가 한창이다. <석현철 기자>
경매가 끝나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 그는 땀을 닦으며 다시 내일을 준비한다. 정오의 태양 아래 다시 울려 퍼질 그의 함성은 단순한 호가가 아니다. 그것은 성주의 땅을 일궈낸 농민들에 대한 예우이자, 황금빛 결실이 제 가치를 인정받길 바라는 간절한 기도다. 오늘도 그는 농민의 이름으로 외친다. "자~아, 다시 봐라!" 그 짧은 문장 속에 우리네 농촌의 한 해가 오롯이 담겨 있다.
석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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