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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경의 사람학교] 쓰레기 봉투를 들고 출근하는 9선 의원

2026-03-24 06:00
박혜경 한동대 교수

박혜경 한동대 교수

2011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였다. 월요일 아침이면 옆집 남자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와 집 앞 수거 장소에 조용히 내려놓고 출근길에 올랐다. 그는 목요일이면 돌아와 주말에는 잔디를 깎고 정원을 돌봤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직접 키운 방울토마토와 장미꽃을 든 그 이웃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이웃, 환영합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귀국 인사를 간 내게 미시간 문양이 새겨진 문진을 선물하며 그가 말했다. "과학우주기술위원회가 한국을 방문하는 날 꼭 다시 만납시다."


그는 미국 연방하원의원 번 에일러스(Vern Ehlers)였다. 1993년부터 2011년까지 미시간 3선거구에서 9선을 지냈으며 물리학 교수 출신답게 과학 정책과 STEM 교육 강화에 힘썼다. 건강이 좋지 않던 부인까지 돌보며 국가와 지역의 일에 매진하던 그는 지역민에게 존경받았다. 2017년 그의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 화려한 업적보다 먼저 떠오른 건 월요일 아침마다 양복을 입은 채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오던 모습이었다. 낯선 타국에서 한 정치인으로부터 받았던 예상치 못한 환대는 귀국 후 우리 정치의 민낯을 다시 마주한 내게 질문으로 돌아왔다. '정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큰 자리'가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작은 일상으로 감당하는 태도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번 에일러스 의원은 쓰레기 봉투 하나로 보여주었다. 미국의 연방하원의원은 예산과 법률을 다루며 지역과 연방의 이해를 조정해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는 막중한 권한의 자리다. 그런데 그는 출근 전에 쓰레기 봉투부터 직접 들었다. 자신의 생활 속 책임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우리 국회의원도 국민의 삶을 바꿀 법과 예산을 다룬다. 연봉은 1억6천만 원 안팎에다 불체포·면책특권, 의원회관 사무실과 전용 차량, 최대 9명의 보좌 인력까지 따른다. 지원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공적 책임이 무겁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책임'보다 '군림'에 가까운 그들의 모습을 더 자주 목격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보좌진에게 사적 심부름을 맡겼다는 갑질 논란, 폭언과 모욕으로 조직을 줄세웠다는 보도, 인권침해를 겪고도 참고 넘어갔다는 증언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문제는 개인을 넘어 문화와 구조다. 함께 일하는 사람의 존엄조차 지키지 못하는 곳에서 '국민'을 너무 쉽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공직자의 품격은 직함이 아닌 태도에서 나온다. 정치가 소명인지 직업인지, 특권인지 책임인지를 구별하려면 다음 선거에서 우리는 후보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사람은 보좌진에게 사적 심부름을 시킬 사람인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존엄을 지킬 사람인가. 자기 이름을 위한 이벤트성 일정을 늘릴 사람인가, 민생 현장을 직접 밟고 끝까지 책임질 사람인가. 특권을 누릴 사람인가, 책임을 질 사람인가.


내가 만난 타국의 한 의원은 쓰레기도, 인사도, 환대도 직접 실천하며 그 질문에 행동으로 답했다. 작은 일상에서 책임을 다했기에 그의 큰 권한은 아름답게 지탱될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 국민도 쓰레기 봉투를 들고 출근하는 의원을 '특별한 미담'이 아니라 '당연한 풍경'으로 만날 날을 고대해본다.


번 에일러스 의원. 쓰레기 봉투를 들고 장미꽃을 건네던 그 손이 지금까지 내게는 정치의 가장 선명한 기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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