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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의 시와함께] 김민정의 ‘널’

2026-03-23 06:00
신용목 시인

신용목 시인

보은 가는 길에 천안 지나 제철 맞은 복숭아


과수원 주인이 직접 못 박아 만든 궤라 하여


12만 원 주고 복숭아 두 궤짝을 샀습니다


단단하다 다디달다 무르다가 물리다가


두 개의 빈 궤짝에다 새 신문지를 깔고


사과도 넣어놨다가 모과도 쌓아놨다가


궤 사이사이


지금은 든 게 하나 없어


때려 박힌 못들의 갖가지 둥근 머리만이


은색 민자 단추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복숭아를 사지 않고 복숭아 상자를 사는 사람이 있다. 복숭아 맛에 대한 이야기를 복숭아 먹는 사람 이야기보다 길게 하는 사람이 있다. 아예 복숭아 먹는 사람은 잊어버리고 복숭아 상자에 담을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한 철을 다 보내는 사람. 그리고 복숭아 상자에 박혀 있는 못자국을 그 모든 시간을 채워놓은 단추처럼 바라보는 사람. 그 순간 상자는 빈 게 아니라 이 세계의 단단한 이유들로 가득하다. 복숭아 먹는 사람보다 복숭아 맛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 복숭아 상자에 담긴 복숭아 아닌 것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복숭아보다 복숭아 상자가 필요한 이유. 빈 상자가 없었다면 거기 깐 신문지에 가득했을 전쟁과 재난과 파국의 소식들을 우리가 지나올 수 있었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유들은 대체로 든 게 하나도 없다. 이유 없는 고통이 누군가의 무릎을 꺾고 이유 없는 슬픔이 누군가의 새벽을 태운다. 바로 그 자리에, 이유 없는 것들의 세계가 어떻게 빛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복숭아를 사지 않고 복숭아 상자를 사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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