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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경의 공간의 문장] 도시의 틈, 그 사이의 배려

2026-04-03 06:00

다양한 여백에 흐르는 도시의 품격

대구의 품격 있는 여백 신천. 신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과 녹지, 휴식 공간들은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도시의 여유와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윤동주 사진작가 제공>

대구의 품격 있는 여백 신천. 신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과 녹지, 휴식 공간들은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도시의 여유와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윤동주 사진작가 제공>

세계적인 역사학자 William H. McNeill(윌리엄 맥닐)은 그의 저서 'Plagues and Peoples(전염병의 세계사)'에서 전염병을 단지 우연히 발생하는 재앙이 아니라 인간사 전체를 바꾸는 중요한 변수로 설명한다. 전염병은 생태계뿐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인류 문명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요인이 돼 왔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역시 그러했다. 2023년 장기 관리 체계로 전환되면서 의학적 위력은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그 전염병이 바꾼 우리의 삶의 방식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활 방식이었다. 프랑스식 인사인 비쥬(bisou)처럼 볼을 맞대는 인사는 물론이고 악수나 가벼운 포옹조차 조심해야 했던 시기를 우리는 경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염병을 막기 위해 시작된 '거리두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주는 편안함과 배려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있어야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 어느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거리'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도 그런 '사이'와 '틈'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 설계를 하는 사람에게 '사이, 틈, 거리'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다.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예의와 배려를 만든다면, 도시에서도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은 도시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배려하는 방식이라면, 도시 속에서도 일종의 '공간두기'가 필요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사람과 건물 사이, 길과 집 사이에 비워진 틈으로 바람과 빛이 흐르고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이 머문다. 결국 아름다운 도시란 건물을 얼마나 많이 세우느냐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여백을 얼마나 남겨두느냐에 달려 있다.


도시의 틈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건물 사이의 물리적인 이격 공간뿐 아니라 광장과 공원, 놀이터, 공공건축물의 열린 1층 공간, 옥상정원, 그리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까지 모두가 도시를 숨 쉬게 하는 중요한 틈이다.


AI가 그린 동대구역 광장 도시숲 이미지. <이미지(성모경)=생성형 AI>

AI가 그린 동대구역 광장 도시숲 이미지. <이미지(성모경)=생성형 AI>

한 번은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가 한여름 대낮에 동대구역에 도착해 역 밖으로 나왔다가 숨이 막힐 듯한 열기 때문에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구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야 할 도시숲은 동대구역 광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늘 없는 광장에 낯선 조형물이 서 있는 풍경보다, 여행자가 도시의 첫인상을 시원한 숲과 그늘에서 시작한다면 훨씬 여유롭고 아름다운 도시의 기억이 되지 않을까. 도시의 이미지는 그렇게 작은 배려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물론 대구에는 이미 훌륭한 도시의 '틈'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도시를 관통하는 신천은 대구를 가장 대구답게 만드는 중요한 공간이다. 신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과 녹지, 휴식 공간들은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도시의 여유와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가진 도시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신천에 대한 고민과 연구는 행정뿐 아니라 건축, 도시, 조경,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어지고 있다. 강은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도시의 형성과 성장, 그리고 정체성을 함께 만들어가는 중요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구건축비엔날레 기획전시 때문에 스페인의 빌바오(Bilbao)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도시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프랑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화려한 구겐하임 미술관(Museo Guggenheim)을 가장 먼저 이야기한다. 하지만 직접 가본 빌바오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도시를 흐르는 네르비온강(Nervión River)과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다양한 도시 공간들이었다.


강을 따라 걷고, 건너고, 달리고, 머무를 수 있도록 만든 수많은 공간과 연결의 아이디어들이 도시 전체에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도시의 변화는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라 그 사이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준 경험이었다.


빌바오 네르비온 강과 수변공원은 도시와 직접 연결되어 확장된다. <본인 제공>

빌바오 네르비온 강과 수변공원은 도시와 직접 연결되어 확장된다. <본인 제공>

도시의 틈은 공원이나 강변 같은 외부 공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을 위해 건물의 일부를 내어주는 공공건축물의 1층이나 옥상도 훌륭한 도시의 틈이 된다. 초등학교 후문 앞에 청소년시설을 설계한 적이 있다. 현장을 답사하면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하교를 기다리며 좁은 골목에서 여름날 땡볕을 피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 건물 1층에 골목을 향해 열리는 작은 '맘카페'를 만들었다. 그늘 없는 골목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부모들이 그 공간을 편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건축이 도시의 작은 배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1층을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행정공간을 위층으로 배치하는 주민센터나 행정복지센터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건물의 옥상을 시민들에게 개방한 공중정원 역시 도시 속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여유로운 공간이다. 대구 서구청 옥상정원은 도심 속 품격 있는 여백의 공간으로 주민들을 위한 열린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좋은 사례이다.


고령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에서 가로변에 그늘과 쉼터를 만드는 일, 시민을 위해 건물 앞 좋은 자리를 비워 공개공지로 만드는 일, 공공건축물이 마당과 옥상을 시민들에게 내어주는 일. 이런 작은 공간의 배려들이 모여 도시의 품격을 만든다.


대구 서구청 옥상정원은 방문객을 위한 배려와 공공건축의 지향을 보여준다. <대구 서구청 제공>

대구 서구청 옥상정원은 방문객을 위한 배려와 공공건축의 지향을 보여준다. <대구 서구청 제공>

도시는 건물을 세우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무엇을 더 채우느냐보다 무엇을 비워두느냐가 때로는 더 중요하다. 사람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고, 바람과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여백이 도시의 일상을 훨씬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좋은 도시들도 대부분 그렇다. 거대한 건축물보다 오래 머물 수 있는 광장, 강변의 산책길,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벤치처럼 사람을 위한 작은 공간들이 도시의 인상을 오래 남긴다. 결국 사람들은 건물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흐르는 시간과 풍경을 기억한다.


도시의 품격은 거대한 건축물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길가의 작은 그늘, 강변의 산책길, 공공건축의 열린 마당, 1층을 기꺼이 주민들을 위해 비워내는 행정의 양보처럼 사람을 위해 비워둔 공간에서 도시의 배려가 드러난다. 건축가로서는 아이러니한 결론이지만, 결국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사이에 남겨둔 '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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