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제49회 이상문학상 대상 발표 기자간담회에서 위수정 소설가가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 초 국내 문단에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이상문학상 수상자 전원이 여성으로 선정된 것. 이는 이상문학상의 49년 역사상 최초다. 단편소설 '눈과 돌멩이'로 대상을 받은 위수정 작가를 비롯해 김혜진('관종들'), 성혜령('대부호'), 이민진('겨울의 윤리'), 정이현('실패담 크루'), 함윤이('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모두가 여성이었다. 수상자 전원이 처음으로 남성이었던 1982년 이후로는 44년 만의 일이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문단에서 여성 작가들의 존재감이 커진 지는 꽤 오래 됐다. 해외 시상식까지 범위를 넓히면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2016년 한강의 맨부커상 국제부문 수상을 시작으로 2024년 노벨문학상에 이르기까지 지난 8년 동안 한국 작가들이 국제문학상을 총 31회에 걸쳐 수상했는데, 이 중 한강, 김혜순, 편혜영, 손원평, 윤고은, 김초엽, 황보름 등 여성 작가의 수상 횟수가 22회로 3분의 2를 차지했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 사진은 2024년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열린 연회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독자들도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찾는 경향이 뚜렷하다. 지난해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을 모은 '2025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에 따르면, 1위에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2위에는 양귀자의 '모순', 4위엔 성해나의 '혼모노'가 올랐다. 베스트셀러 한국소설 상위 20위 안에 든 남성 작가는 2명에 불과했다. 문단은 물론 출판계에도 여풍(女風)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열린 강연 '망하도록 두기엔 너무 아름다운 세상이라'. 조예은 소설가, 최진영 소설가, 양경언 문학비평가(왼쪽부터)가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조현희기자
1992년 출간된 양귀자의 장편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여성의 욕망을 그리는 작품이다. <쓰다 제공>
◆女 사회진출 늘며 90년대 작가 대거 등장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지만, 먼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들 수 있다. 과거에는 '여류(女流) 시인' '여류 작가'라는 표현이 통용될 만큼 여성 작가는 남성 중심의 문단에서 희소한 존재로 여겨졌다. 1980년대 이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크게 상승하면서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대학을 진학한 세대가 사회에 진출한 1990년대 초, 은희경, 신경숙, 공지영, 공선옥 등의 작가가 등장해 문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지역 문단은 어떨까. 대구경북에서도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류인서 시인은 "문학 하는 사람들 자체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며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진 데다 국문과 등 인문계열에 여학생 비율이 높은 영향도 있고, 최근엔 늦은 나이에 창작에 도전하는 여성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주 먼 과거엔 여성 작가들에 '여류'라는 수식어가 붙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육체·욕망·퀴어…보기 힘들던 신선한 주제 눈길
여성 작가들이 다루는 주제도 주목할 만하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과거 한국 문학은 조정래, 황석영, 이문열 등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분단과 전쟁, 이념 등 거대 담론을 다루는 작품이 주를 이뤘다"면서 "이와 달리 여성 작가들은 일상, 육체, 욕망, 여성 성장 서사 등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독자들의 관심사가 이념 문제에서 개인의 삶으로 바뀌면서 이런 주제는 더욱 인기를 끌었다.
2016년 출간된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민음사 제공>
대표적으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양귀자의 장편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있다. 작품이 발표된 1992년,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성의 욕망과 권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시선이 강했다. 이 작품은 당시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상에 과감히 반기를 들어 문단에 충격을 줬다.
201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부상하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더 관심이 모이게 됐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미투(MeToo) 운동 등을 거치며 성평등·여성 의제가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고, 문단의 분위기 역시 이런 흐름과 맞물려 변화했다. 이 시기 출간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16)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인데, 페미니즘 운동에 힘입어 입소문을 타고 100만부 이상 팔렸다. 최근엔 여성 서사에 퀴어, 환경, 장애 등 사회적 의제를 결합한 작품들이 나오며 주제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한국 소설 독자 대부분이 젊은 여성인 점도 주된 이유로 꼽힌다. 지난해 교보문고에서 한국 소설을 구매한 독자 중 여성 비율은 70.8%로 나타났다. 이 중 20대와 30대는 각각 21.7%, 19.2%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지난해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은 도서전 방문객은 15만명으로 추산됐는데, 대다수가 2030 여성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직장인 김민주(28)씨는 "재밌어 보이거나 추천받은 책을 보면 대부분 여성 작가의 소설"이라며 "주변에 문학 즐기는 사람들을 봐도 대다수가 또래 여성들"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의 대만 주빈관에서 방문객들이 책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독자들 "꼭 여성이라 읽는 건 아냐…좋은 문학 찾아"
그렇다면 독자들은 여성 작가의 책이면 무조건적으로 읽는 걸까. 그건 아니다. 취향에 맞는 좋은 문학을 찾을 뿐이지, 특정 성별의 문학을 찾는 건 아니라고 전했다. 김씨는 "책이 나온 시대가 달라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과거 문학은 여성을 수동적·보조적인 존재로 그리거나 여성의 신체를 불필요하게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그런 불편한 부분이 적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여성 작가라고만 해서 읽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류 시인은 "'여성 문학'이란 표현도 여성 서사를 담고 있는 경우나 페미니즘 관점에서 이야기할 때는 사용할 수 있겠지만, 문학에 성별을 붙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여성 작가들의 수 자체가 많기 때문에 작품도 많이 나오고, 독자도 여성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문장에 대한 공감도 많았다. 1998년 출간된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은 지금도 베스트셀러 순위권을 유지하는 작품이다. 광고·마케팅 없이 인기를 끌었는데, 책 속 문장들이 SNS를 통해 공유되며 역주행했다. 작품에는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등 인생의 진리를 표현한 문장들이 등장한다.
국내 여성 작가들의 책이 젊은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책을 펴낸 출판사 '쓰다'의 심은우 대표는 영남일보와의 통화에서 "젊은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책 판매량이 꾸준히 늘었다"며 "독후감 등 리뷰를 찾아보면 문장을 필사한다거나 발췌해 많이 올린다. 모순의 문장에 대한 공감이 특히 많은 듯하다"고 전한 바 있다.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