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배·손모양 달리한 독특한 통일신라 탑 몸돌
경주시청 인근 어린이공원 한복판 ‘절터’ 흔적
우리 생활공간 속 무심히 놓인 천년의 문화유산
“백률·호원사 잇는 불교 지형 속 절이었을 것”
경주시청 인근 동천동 어린이공원 안에 자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놀이터와 벚꽃나무, 벤치가 있는 생활공간 한복판에 통일신라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동네 사람 눈에는 그냥 '놀이터 옆 큰돌'일 수 있다. 경주시청 인근에 있는 동천동 어린이공원(양정로 274) 잔디밭 한쪽, 낮은 펜스 안에 놓인 석조물은 설명판을 읽기 전까지는 그저 오래된 돌덩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네 면에 서로 다른 부처가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절터에 남은 드문 형식의 탑 몸돌, 경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이다.
3일 정오가 지나서 찾은 현장의 어린이공원에는 시청 어린이집 유치원생들이 점심을 먹은 뒤 야외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미끄럼틀과 놀이시설 주변을 오가며 뛰놀았지만 사방불탑신석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벤치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점심시간을 맞아 잠시 들른 직장인들이 커피를 들고 쉬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어르신이 벤치에 몸을 기대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경주시 양정로 274 동천동 어린이공원 입구에 설치된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안내 표지판. 벚꽃이 핀 공원 풍경 속에 통일신라 문화유산의 위치를 알리고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그래서 이 유산은 더 경주답다. 박물관도, 절집 마당도 아닌 시청 뒤편 어린이공원 한복판에 신라 석조 유산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경주에서는 문화유산이 늘 특별한 공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매일 스쳐 지나가고 쉬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생활 공간 안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동천동 사방불탑신석도 그렇다.
처음 보면 왜 이런 돌이 공원 안에 있나 싶다. 크지도 높지도 않다. 멀리서 보면 조경용 석재나 오래된 구조물 일부처럼 보이기 쉽다. 그런데 몇 걸음만 더 다가가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몸돌 네 면에 좌상의 불상이 새겨져 있고 면마다 손모양이 다르다. 어떤 면은 마모가 깊고 어떤 면은 얼굴 윤곽과 옷주름이 비교적 또렷하다. 한쪽은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있고, 다른 한쪽은 광배의 흐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같은 몸돌 안에 남은 네 부처가 저마다 다른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는 셈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통일신라 절터에 남은 탑 몸돌로 네 면에 서로 다른 불상이 새겨져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이 탑신석은 절터에 남아 있는 탑의 몸돌이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고 네 면을 파서 모두 좌상의 불상을 넣었다. 불상은 각각 손모양이 다르고 조각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서쪽 면은 비교적 얕게 새겼고 동쪽과 남쪽 면은 더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불상의 광배도 서로 다르다. 아래 받침에는 8개의 연꽃이 새겨져 있고 몸돌과 한 돌로 이어진 지붕돌에도 8개의 연꽃무늬가 남아 있다. 석탑 몸돌에 사방불을 새기고 연꽃무늬 받침과 지붕돌을 함께 갖춘 형식은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서도 드문 사례로 꼽힌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유산이 하필 어린이공원 한복판에 남아 있을까. 박임관 경주문화원장은 이 탑신석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박 원장은 "독특하게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불상을 새겨 세워놨잖아요. 그러면 그게 다른 데서 가져 왔다고는 볼 수가 없고 제가 볼 때는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어린이공원 잔디밭 한가운데 자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주택가와 생활공간 사이 낮은 펜스 안에 통일신라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실제 현장을 보면 그 말이 낯설지 않다. 탑신석이 놓인 자리는 주변보다 지면이 조금 낮다. 그냥 공원 지형의 차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박 원장은 그 낮은 자리 자체가 옛 절터의 흔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놀이터 지면보다 조금 낮잖아요. 원래 그 낮은 게 맞고 오랫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곳은 흙이 쌓여 지표가 조금 높아졌을 수 있다"며 "절터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고 했다.
탑신석 주변에 남아 있는 다른 석재들도 눈길을 끈다. 몸돌 옆에는 네모난 판석 형태의 돌 여러 점과 둥글게 다듬어진 듯한 석재가 함께 놓여 있다. 정확히 어떤 부재였는지 단정하긴 어렵지만 탑신석만 덩그러니 남은 것이 아니라 주변에도 옛 구조물의 흔적이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름을 잃은 절터의 시간은 몸돌 하나가 아니라 그 곁의 돌들에도 함께 남아 있는 셈이다.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옆에 남아 있는 석재들. 몸돌 주변에 판석 형태의 돌과 둥근 석재가 함께 놓여 있어 옛 절터와 구조물의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다만 절 이름이나 내력을 보여줄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박 원장은 "절터로는 보이는데 절 이름이라든지 유추할 만한 게 전혀 없다"고 했다. 이름 없는 절터의 흔적만 남고 탑의 몸돌 하나가 오늘까지 버텨온 셈이다.
박 원장은 이 일대를 신라 불교 지형 안에서 읽었다. 지금의 동천동은 신라 때 금강산으로 불리던 소금강산과 이어지고 백률사와도 가깝다. 더 서쪽으로 가면 현재 서천 인근 호원사가 있던 자리와도 연결된다. 박 원장은 "위치적으로 볼 때 백률사 쪽하고도 이어지고 다시 서쪽으로 오면 호원사가 있던 쪽과도 일직선상에 놓인다"며 "신라 때 이 일대에 꽤 괜찮은 절 하나가 있었을 거다, 이 정도로 본다"고 말했다. 문헌으로 확정된 사실은 아니지만 주변 유적의 흐름과 입지를 놓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추정이다.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윗면과 지붕돌 부분. 통일신라 탑 몸돌과 한 돌로 이어진 지붕돌에 연꽃무늬 흔적이 남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더 흥미로운 건, 왜 이 몸돌만 남았느냐는 대목이다. 신라가 망한 뒤 절터의 석재들은 오랜 세월 집 짓는 재료나 정원석으로 흩어졌다. 경주 곳곳의 절터가 그렇게 허물어졌다. 박 원장은 "주춧돌부터 기단에 있는 돌들까지 다 가져와서 집 만드는 데 다 써버렸지. 신라가 망하고 거의 천년 동안 주인 없는 돌이 돼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상이 새겨진 몸돌은 달랐다. 박 원장은 "다른 돌은 정원석이나 조경물로 쓸 수가 있는데, 부처님이 새겨진 것은 함부로 못 가져간다"며 "불교를 믿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고 안 믿는 사람도 자기 집 마당에 놓는 걸 거리끼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쓸모 있는 돌들은 흩어졌지만 성스러워서 쉽게 손대지 못한 돌은 오히려 그 자리에 남았다는 얘기다.
경주시청 인근 동천동 어린이공원 잔디밭에 자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 벚꽃이 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가운데 통일신라 절터의 흔적이 생활공간 속에 남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몸돌 곳곳에 남은 파손 흔적도 눈에 들어온다. 한 면은 머리 부분이 크게 떨어져 나가 있고 다른 면도 마모와 훼손이 적지 않다. 박 원장은 이런 훼손이 현대나 일제강점기보다 조선시대 성리학 질서 속 불교 배척과 더 관련이 깊을 수 있다고 봤다. 그는 "경주 남산에 불상도 그렇고 경주박물관에 있는 것들도 목이 날아간 경우가 많다"며 "일제 때 그런 게 아니라 그 전에 벌써 훼손된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영향으로 불교를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주 동천동 사방불탑신석의 이 작은 몸돌 하나에는 통일신라 조각 수법도, 이름 잃은 절터의 흔적도, 신라 멸망 뒤 흩어진 석재들의 운명도, 조선시대 불교 배척의 상처도 함께 남아 있다. 아는 사람에겐 천년의 시간이고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놀이터 옆 오래된 돌일 수 있다는 점까지 이 유산은 꽤 경주답다.
장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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