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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떠난 자가 구한 고향

2026-04-09 06:00
정혜진 변호사

정혜진 변호사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사>제주올레 전 이사장이 엊그제 작고했다. 여행이나 걷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고인의 이름은 몰라도 '올레길'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유명 관광지만 훑고 지나가던 패키지 일변도의 여행 문화를, 느릿느릿 걸으며 지역을 경험하는 여행으로 '여행 문화'를 바꿔놓은 이가 서명숙이다. 2008년, 대구 동구에서 팔공산 올레길을 처음 조성할 때도 그분을 모셔다 강의를 들었고, 이후 대구 올레길이 여덟 코스나 생겼으니 우리 지역에도 고인이 남긴 유산이 남아있는 셈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녀가 올레길을 만든 배경에는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 있었다. 삶에 지쳐 홀로 800㎞ 순례길을 떠났던 그녀는, 예상치 못하게 그 길에서 어린 시절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던 고향 제주의 하늘과 바다와 바람을 자신이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제주에 산티아고 같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내겠다고 결심한 무렵인 2007년 6월, 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결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제주 올레길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관점을 조금 바꿔, 고인을 '지방 인재'의 새로운 유형으로 기억하고 싶다. 지방에서 태어나 성장한 자가 더 큰 세계로 떠났다가 다시 지방으로 와서 어떻게 지방을 구하는지 서명숙은 삶으로 보여주었다. 제주 서귀포읍 시장통에서 자란 서명숙은 '얼른 자라서 갑갑한 이곳에서 벗어나 번쩍거리는 불빛과 높은 빌딩이 있는 서울로 가게 되기를' 간절히 꿈꾸었고, 꿈을 이루었다. 그러다 운명처럼 고향의 정수를 재발견하고는 귀향해 올레길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서울 생활 20년 동안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 다양한 경험에서 축척된 추진력과 객관적인 시선을 십분 활용했다. 본래부터 주어져 있던 제주 길의 가치를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게 '번역'해 내기까지 지방의 가치도 서울의 경험도 모두 필요했다.


길을 내는 과정에서 밝힌 가족사도 뭉클을 감동을 주었다. 조폭 출신 남동생과의 화해 이야기다. 공부 잘하던 누나는 서울로 떠나고, 제주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조직폭력배로 살았던 남동생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깊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세계적인 길을 만들겠다고 호기롭게 나선 누나는 정작 제주의 구석구석을 몰랐고, 제주에 머물렀기에 제주 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동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누나는 동생에게 '제주올레 탐사대장'이라는 적절한 직함을 주었다). 바야흐로 선거철이 다가와서 그런지, 서명숙과 남동생의 이야기는 단순히 남매의 화해를 넘어, 고향을 떠났던 자와 고향을 지키며 그 가치를 몸소 체득한 자가 만나 이룬 '지역적 화합'의 은유로도 읽힌다.


굽은 소나무처럼 고향을 내내 지킨 인재도 귀하지만, 고향을 떠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가 다시 돌아와 '떠나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이들도 있다. 다가올 선거에서 지역민의 선택을 받을 이 중에는 이 지역을 한결같이 지켜온 이도 있고, 넓은 세상을 보고 다시 돌아온 이도 있을 것이다. 서명숙과 그 동생이 그러했듯,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자라온 지방 인재들이 머리를 맞대고 화합하여 우리 지역의 진정한 가치를 함께 이끌어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길 위에서 인생을 바친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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