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난·고물가 장기화 속 청년들 독립 유예
집안일 적극적으로 도우며 ‘전업자녀’ 자처
부모세대도 사회 현실 고려해 이해하는 추세
“미독립 청년, 복지 자원으로 활용하거나
연말정산 인적공제 대상연령 상향 등 검토를”
전업자녀는 취업난과 고물가 속에서 독립을 유예하고, 가사·돌봄을 수행하며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성인 자녀를 의미한다. 사진은 청년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 <이미지=생성형 AI>
성인이 되면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하는 게 통상적인 삶의 경로로 여겨진다. 그러나, 경기 불황 속 취업·결혼·출산 등의 여파로 독립 시점이 잇따라 늦춰지며 청년들이 처한 삶의 환경은 바뀌었다. 본인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대신 부모와 한집에 머물면서 정착하는 기류가 형성된 것. 한때 이들은 '캥거루족(부모에게 경제·주거 생활을 의존하는 성인)'으로 불리며 부정적인 시선의 대상으로 인식됐지만, 최근엔 '전업 자녀(가사 업무로 부모에게 월급을 받는 성인)'라 불리며 저성장 구조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청년들의 현실적 선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자녀 세대의 '이유 있는 선택'과 이를 지지하려는 부모 세대의 '내리사랑'이 맞물리며 전업 자녀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고물가 시대, 독립 유예가 합리적 선택"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박민아(29)씨가 어머니 채성미(59)씨에게 편집 프로그램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박 씨는 "고물가 상황에서 사회초년생이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도 크다"고 말했다. 박민아씨 제공
지난 2일 영남일보 취재진이 만난 박민아(여·29)씨는 현재 경북대학교 생명공학부 대학원생이다. 그는 2017년 경북대 생명공학부에 입학해 의료 분야 전문 직종에 취직하겠단 꿈을 키웠다. 하지만 취업난과 취업 스펙(SPEC) 준비 등을 이유로 휴학을 반복하다가 27살인 2024년에야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박씨는 부모로부터 경제적·사회적 독립을 준비했지만, 금세 생각을 접었다. '취업' 문을 뚫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먹고사는 생존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면서다. 어쩔 수 없이 그가 20대 끝 무렵까지 삶의 방향으로 정한 건 '학업 연장(대학원)'. 자연스레 부모와 함께 살던 자택에 지속 머물며, 용돈을 타 쓰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부모에게만 의존하며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는 생각에 여느 청년들과는 사뭇 다른 결정을 내렸다. 부모의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최선의 방안으로 '전업 자녀'의 삶을 스스로 택했다. 부모와 협의 끝에 취업 전까지 학업을 병행하며 집안 가사 일을 도우는 방식으로 '용돈' 대신 '월급' 개념의 생활비를 지급받기로 한 것이다.
박씨는 "솔직히 나는 캥거루족과 전업 자녀 느낌보단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아직 자립의 꿈을 놓지 않은 상위 개념의 독립 유예 성인 자녀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실, 20대 초반엔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지만,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독립하면 월세와 생활비 등 비용 부담이 커서다"며 "취업 여건이 워낙 어렵다 보니 부모님도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 편이다. 현재 인터넷 주문이나 은행 업무, 설거지, 청소 등 모든 가정일은 내 담당이다. 30대엔 진정한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최근엔 소소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저축 등 자산 형성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독립 유예'는 자녀만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 세대의 인식 변화와도 맞닿아 있었다. 박씨의 모친 채성미(여·59)씨는 "요즘 청년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 때와는 완전 다르다. 부모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며 "최근 용돈 받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공짜로 생활비를 받지 않겠다고 해 놀랐다. 처음엔 언제 독립해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는데, 요즘엔 조금이나마 안심이 든다"고 덧붙였다.
계명대학교 임운택 교수(사회학과)는 전업 자녀 등 독립을 잠시 유예한 이들에 대해 "전업 자녀는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환경 속에서 나타난 결과"라며 "취업난과 고비용 구조 속에서 독립을 유예하는 것이 청년층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작동하고 있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의 불안정한 독립에 따른 부담을 줄이고, 가사와 돌봄을 분담하는 현실적 이점을 얻는 점에선 전업 자녀가 나쁘다고는 볼 수 없다"고 진단했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 전업자녀 확산 배경
2030세대 신규 채용 건수 및 쉬었음 청년 현황. <인포그래픽= 생성형 AI>
전업 자녀는 2023년 청년 실업률이 급등한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다.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도 이 표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최근 SNS에서 스스로를 전업 자녀라 소개하며 부모의 도시락을 싸거나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쏟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전업 자녀는 단순한 무직 상태가 아니라, 가사·돌봄을 중심으로 부모와 자녀가 역할을 교환하는 관계에 가깝다. 부모 입장에선 가사·돌봄 등 외부에 지불해야 할 비용을 가정 내부에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부모의 일방적 지원에 의존하는 캥거루족과는 다른 성격을 띤다.
그렇다고 해서 전업 자녀가 꼭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가정환경, 개인 선택 등 사회·경제적 조건 등에 따라 독립 유예 유형이 분류돼서다. 일반적으로 전업 자녀는 △히키코모리로 불리는 은폐무위형 △취업·창업 실패 등 구조적 요인으로 독립을 미루는 외부압력형 △독립을 전제로 한 과도기적 상태인 전환대기형 △가사·돌봄을 대가로 일정한 보수를 받는 가사돌봄형 △가정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자발적으로 의존하는 자발선택형 등으로 나뉜다.
국내에서 전업 자녀가 등장하게 된 원인으론 지속적인 청년 일자리 부족 등이 꼽힌다. 국가데이터처(KOSIS)에 따르면, 전국 업종별 임금 근로 일자리 중 2030세대 신규 채용 건수는 2022년(1~4분기) 1천118만8천건, 2023년 1천48만7천건, 2024년 1천7만8천건으로 매년 감소했다. 분기별로는 가장 최근 수치인 지난해 3분기(240만8천건)의 경우 전년 동기(252만5천건) 대비 4.6%(11만7천건)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노동시장 밖에 머무는 청년 규모도 전업 자녀 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다. 동북지방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전국 청년층(15~29세) '쉬었음' 인구는 2015년 33만3천명에서 2024년 43만3천명으로 약 23% 증가했다. 대구의 경우 2015년 1만9천명에서 2024년 2만2천명으로 10년 새 15.8% 늘었다.
이에 대해 계명대 김규현 교수(경제금융학과)는 "전국적으로 청년층이 선호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데다, 최근엔 '경력 있는 신입'을 선호하는 채용 경향까지 겹치면서 사회초년생들이 처한 현실이 녹록지 않다"며 "지역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유출되거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해 졸업과 취업 사이 공백이 길어진 것이 전업 자녀 현상을 키우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를 대구로 한정하면, 지난해 초부터 17개 시·도 중 고용률이 가장 낮은 지역으로 분류된 탓에 전업 자녀 현상이 타 지역보다 확산될 경향이 크다"고 내다봤다.
◆"전업자녀 짐 아닌 힘으로 활용하려는 전략 필요"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전영수 교수(지속가능경제학과).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전영수 교수(지속가능경제학과·'전업자녀' 도서 출간)는 전업 자녀를 더 이상 청년층의 일탈로만 치부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가파른 시대 변화 속에서 청년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활 전략'에 가깝다 보니, 그 사회적 책임과 과제가 뒤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저성장 사회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자녀 세대의 고육지책과, 이를 지지하는 부모 세대의 내리사랑이 맞물리며 전업 자녀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며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흐름인 만큼, 이를 '짐'이 아닌 '힘'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 교수는 성인이 된 자녀의 독립이 지연되는 현실을 반영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업 자녀 가정의 경우 세대 간 자원 교환이 끊기고 경제적 기반이 약화돼 고령화된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부정적인 '노노돌봄'이란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할 수 있어서다.
그는 "정부가 일정한 능력과 의지를 가진 미독립 청년을 돌봄 등 사회서비스 영역과 연계해 수요가 많은 복지영역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게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전업 자녀와 같은 '유휴 인력'을 흡수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 공급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부적으론 전업 자녀와 연계한 세금 공제와 수당 지급 등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는 "우선 현재 만 20세에서 종료되는 연말정산 인적공제 대상 연령을 상향하는 방안이 검토됐으면 한다"며 "자녀 부양 기간이 30대까지 길어진 현실을 반영해 부모의 세금 부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대한의 복지 확장 측면에선 전업 자녀가 고령의 부모를 직접 돌볼 경우에 가족돌봄 수당을 지급하는 모델도 가능하다"며 "외부 간병인을 대신해 자녀가 돌봄을 맡고, 국가는 이에 상응하는 비용을 보전하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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